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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81)화 (81/136)

81화

“안 그런 일을 찾는 게 더 쉽겠죠. 이만 갈게요.”

라비엘리는 단단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나왔지만 라비엘리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추어 서 있었다.

쿵, 쿵-

간신히 손을 들어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누른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일도 비슷하려나.’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루시안은 늘 이런 식으로 능청스럽게 굴곤 했으니까.

만약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대도, 설령 제게 끌린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는 자다.

진중한 눈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라비엘리는 그가 제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며 뒤로 물러났다.

제게 늘 솔직한 척하고 있지만 심연 속에 담은 것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무언가를 감추려 부러 천연스레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슴이 뛰는 건 한심한 일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하지만 라비엘리는 고작 한 걸음을 내디디고는 곧바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얼마나 오래 그의 곁을 지킨 것일까.

라비엘리가 문을 닫고 나간 직후, 루시안은 등허리를 베개에 기댄 채 나른히 앉아 있었다.

“귀엽긴.”

슬그머니 고개를 틀어 어둠이 물러가는 창가를 내다보았다.

그 연약한 사람이 설마 꼬박 날을 샌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 끝에 닫힌 문 너머로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복도에 깔린 나무는 전부 뒤틀리고 갈라져 누군가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곤 했는데.

참새가 걸어 다니는 게 아닌 이상 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날아서 내려갔을 리는 없고.”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 루시안은 다리를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윽.”

고작 단검에 베인 상처일 뿐이야.

그렇게 되뇌며 몸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온몸이 욱신거리고 팔다리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아무 감각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딛자 누군가 다시 칼로 찌르는 듯 몸이 비틀렸다. 하지만 루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지독하네.”

집요하게 파고드는 통증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걸음을 디딘 탓이었을까.

누구보다 제 몸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뜻대로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 안에 무거운 납덩이를 채워 넣은 것처럼, 그래 딱 그런 느낌이었다.

라비엘리에게 처방했던 약이라도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 텐데.

약초가 전부 2층에 있다는 사실이 애석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아쉬워할 때가 아니었다.

“엘리.”

닫힌 문 너머 분명 라비엘리가 있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아래로 내려가지도 못한 채 망연한 얼굴을 한 그녀가 분명히 밖에 있다.

가까스로 문 앞에 선 루시안이 문고리를 비틀었다.

덜컥-

거칠어진 호흡을 거둬내자, 문 바로 옆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린 여인이 보였다.

“이런.”

놀란 목소리는 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어도, 무사히 아래로 내려가길 바랐는데.

그랬다면 나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마음이 무너지지도, 힘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비엘리, 일어날 수 있겠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던 라비엘리가 루시안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라비엘리는 남은 힘을 그러모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탓에 마지막 음절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했다.

“괜찮냐고 물어본 게 아니에요.”

“…….”

“일어날 수 있겠어요?”

“네.”

하지만 가녀린 대답만 겨우 흘릴 뿐, 라비엘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루시안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직 회복 중인 환자라는 것도, 여기서 실랑이를 할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 역시 안다.

그러나 완전히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여러 생각만 머릿속을 부유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저를 두고 그만 들어가 쉬라는, 그 간단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서서 계단으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문에 구멍이라도 낸 거냐며 어떻게 알고 나온 것인지 쏘아붙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 웅크린 저를 두고 돌아가 달라는 호흡만 내쉬었을 때였다.

“……!”

무릎 아래 낯선 손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아.”

루시안은 어린애의 인형을 집어 들듯 가볍게 그녀를 안아서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 별말 없이 그대로 제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다친 게 왼팔이라 다행이네.”

태연히 말하고 있었지만 루시안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극심한 통증을 안으로 참아내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 침대 밖에 나와 있는 라비엘리의 신발을 차례로 벗겼다.

얌전히 다리를 모아서는 침대에 올릴 때까지 라비엘리는 아무런 말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

그저 허기진 표정으로 루시안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물을 기운이 남아 있었다면, 문 앞에 주저앉아 있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디가 불편한지, 뭐가 문제인지 한 번 볼게요.”

루시안은 부러 무표정한 얼굴로 라비엘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건 그저 의사의 시선이라는 뜻이었으나, 그녀의 뺨을 매만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고 말았다.

“라비엘리.”

“…….”

“나 때문에 당신 너무 무리했나 봐요.”

“그냥 조금.”

라비엘리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갔다.

“피곤할 뿐이에요.”

루시안은 베개를 한 번 정돈하고는 그녀를 조심스레 눕혔다.

야윈 어깨를 조금 더 붙잡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누르며.

“인제 그만 자요.”

라비엘리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파리한 낯으로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요?”

제게 하는 말이라는 것뿐, 그녀의 음성은 허공에 흩어질 만큼 작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반쯤은 감긴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딱하면서도, 평소처럼 그녀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민 것이다.

‘당신 말처럼 난 정말 미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맥없는 얼굴로 인사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아프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일까.

루시안은 태연한 얼굴로 침대 끝에 걸터앉더니 라비엘리 옆을 파고들었다.

“자야죠.”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으면 ‘내 침대’라고 말할 참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옆에 그녀의 얼굴이 있을 테니, 잘 익은 과실처럼 발개진 뺨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2층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비엘리에게선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

루시안은 고개만 슬쩍 돌려 라비엘리가 누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이미 잠들어 있었다.

“…….”

규칙적이고 고요한 호흡이, 그녀의 잔잔한 숨소리가 루시안의 침대를 채우고 있다.

아기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상하네.”

루시안은 소리 나지 않게 라비엘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조금 전 라비엘리를 안아 든 여파인지 다친 팔이 으스러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는 팔이든, 손이든 움직이기 불편한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새털처럼 우아한 속눈썹을 건드리고 싶은 충동을 좀처럼 참아내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눈이 가장 예쁜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그저 푸른색의 아름다운 눈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뜬 것처럼 본래의 색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매 순간 새파랗게 빛나는 것이 꼭 올랑이는 호수와도 같았다.

잠이든 라비엘리를 한동안 바라보던 루시안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감아도 예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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