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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80)화 (80/136)

80화

“그 녀석이 가엾다고 생각하면서도 예민하게 구는 걸 받아주지 못했어요.”

루시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누워만 있으니 그게 새삼 미안해지네.”

“곁을 지켜준 것만으로도 친구는 고마웠을 거예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며,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친구가 몹시 딱하게 느껴졌다.

목 아래부터는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니- 이 얼마나 가혹한 삶인가.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실력이 좋은 녀석이었죠. 저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촉망받는 인재였어요.”

라비엘리는 가만히 루시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빛이 사라진 지 오래인 탓에 표정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그저 음울한 목소리 때문인지 루시안이 지금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갑자기 그렇게 된 건가요?”

“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루시안의 말에 의하면 친구의 부모는 작위가 있는 건 아니지만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거상이라 했다.

“그분들의 절망을 곁에서 보는 게 괴로웠어요. 물론 내 마음이 힘든 것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힘들었겠어요.”

라비엘리는 절망이 어떤 식으로 몸집을 키우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절망이란 극복하는 것도, 딛고 일어서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더기처럼 헤진 희망과 잘려나간 제 몸을 묶어 버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저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에 실낱같은 위로를 받는 일이라고.

그런데 그 순간, 라비엘리의 머릿속에 같잖은 위로보다 의미 있을지 모를 일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대석학이라 칭송받는 자, 테아노 마이어의 이름이 스친 것이다.

“루시안.”

테아노에게 부탁해볼 수는 없는 걸까?

“네.”

하지만 말해도 괜찮은 것인지 라비엘리는 잠시 고민했다.

테아노의 뛰어난 의술은 루시안이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테아노에게 말하지 않은 건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아닐까.

“아녜요, 아무것도.”

“말해봐요.”

“괜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둘뿐인걸.”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나른히 말했다.

얼마간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라비엘리가 마음을 먹은 듯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 말씀드려볼 생각은 없어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젖은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그의 표정이 변화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인 데다 그런 미묘한 표정을 잡아내기에는 방 안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 부탁을 들어주시려나 모르겠네.”

“말씀이라도 한 번 드려보는 게 어때요?”

“그러게요, 밖에서는 위대한 학자시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말을 꺼내면 되려나.”

루시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메마른 입술을 억지로 당겨 웃었다.

어둠 속에 스쳐 지나간 희고 고른 미소-

“그래서 치료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래요, 라비엘리. 그럼 정말 좋겠군요.”

하지만 속내를 완전히 감추려던 루시안의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라비엘리는 그제야 루시안의 음성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그런 부탁을 드리는 건 조금 무리일까요?”

“아뇨, 얘기해볼게요.”

“……미안해요.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친구의 일로 누구보다 가슴이 아픈 건 루시안일 터다.

어쩌면 테아노를 가장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공연한 말을 시작한 것 같아 라비엘리가 식어버린 얼굴을 매만졌을 때였다.

“아뇨, 라비엘리. 고마워요.”

“…….”

“그게 최선일지도 모르는데 외면해선 안 되겠지.”

루시안의 목소리 끝에 씁쓸한 기운이 묻어났다.

“루시안.”

“너무 늦지 않게 뭐든 할 겁니다.”

“…….”

“그게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일이든.”

루시안의 표정은 전과 달리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라비엘리는 이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서로 다른 생각에 빠진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문을 연 건 라비엘리였다.

“루시안, 지금 하는 말은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까, 라고 생각하며 루시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당신도 뛰어난 의사잖아요. 내 생각엔 당신이 언젠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

“부담을 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냥 내 느낌이 그래요.”

라비엘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멋쩍은지 고개를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순진한 눈을 하고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라비엘리.”

“네.”

“가끔 신의 뜻이 궁금해요. 나처럼 아무렇게나 사는 놈의 다리를 거두시는 게 나았을 텐데. 그 녀석처럼 쓸모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자 라비엘리가 황망한 얼굴을 하고는 루시안을 노려보았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내 꼴을 좀 봐요, 사고뭉치인 건 맞잖아.”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다친 팔을 가리켰지만, 라비엘리는 웃지 않았다.

“당신이 나서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아마 죽었을 거예요. 악마에게 영혼까지 빼앗겨 지옥에 갔을지도 모르고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운 삶이긴 했잖아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루시안은 이번에도 메마른 음성을 냈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땅에 다시 두 발을 내딛게 된 것이 과연 축복일까.”

“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더러 지금 그 가여운 남자의 불행을 다시 말해보라는 겁니까?”

루시안은 한쪽 눈썹만 들어 올렸다.

“아이가 있잖아요.”

“……저런.”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한숨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단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 그 사람의 아이를 찾아주고 싶어요.”

“누굴 찾는다고요?”

“당신도 이름을 물어봤잖아요. 알릭스, 맞죠?”

“그야 시간을 벌기 위해서.”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네.”

“그래요, 뭐 상관없어요. 내가 찾을 거니까.”

라비엘리가 다부진 목소리를 내자 루시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디로 팔려 간지도 모를 아이를 대체 어디서 찾겠다는 겁니까?”

“에몬 씨가 노예상에 팔았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르죠.”

“이봐요, 상냥하지만 순진한 아가씨.”

“…….”

“에몬의 입을 열게 하려면 적어도 그 아이를 팔면서 받은 돈만큼, 아니 곱절은 줘야 할 겁니다.”

라비엘리는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꾹 붙인 채 턱에 힘을 주자 루시안은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럴만한 돈이 없다면 전국에 있는 노예상을 전부 뒤지는 수밖에.”

“그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겠다고요?”

“할 수 있다면요.”

“왜?”

루시안이 강마른 음성으로 물었으나 라비엘리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은 사내와 어린아이가 딱하고 가여워서, 이유는 고작 그뿐이었다.

어쩌면 가족을 잃은 제 모습을 투영해 그렇게라도 위안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꼭 이유가 분명한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신이 하신 일도 그럴 거라 생각해요.”

“…….”

“괴로움을 달래려 이유를 찾으려 하고 원인을 알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런 것조차 없이 벌어지는 일이 훨씬 많으니까.”

라비엘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루시안이 오른팔을 조심스레 세워 바닥에 받치더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라비엘리가 눈을 크게 떴다.

“누워 있어요.”

“누워만 있었더니 어지러워.”

“하지만.”

“괜찮아, 나 의사인 거 또 잊었어요?”

라비엘리는 당해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가 몸을 세우고 일어서자 이제는 정말 내려가서 쉬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나누려던 대화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짙은 어둠은 어느샌가 물러갔고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만 내려갈게요. 쉬어요.”

“……엘리.”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당신이 조금 전에 한 말.”

루시안은 라비엘리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무슨 말이요?”

“살면서 뭐든 이유를 찾으려 하고 원인을 알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런 것조차 없이 벌어지는 일이 훨씬 많다고.”

다시 떠올릴 만큼 대단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저 중에 감흥을 불러일으킬 부분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몸을 세워 벽에 나른히 기댄 루시안이 입꼬리만 들어 공기를 흘렸다.

잘 익은 포도 같은 향기를 풍기며.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일도 비슷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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