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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79)화 (79/136)

79화

“후작님,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더운물은?”

“네, 준비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그래.”

로제의 말에 테아노는 대충 손짓으로 그녀를 물렸다.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테아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말했던 것처럼 눕자마자 잠이 들 수 있을 만큼 고단했다. 제 몸속에 쌓인 피로의 형체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로제가 가져다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대신, 진료 가방을 펼쳤다. 출발할 때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던 것과는 다르게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마구 포개진 기구와 약병 사이에서 펜 한 자루와 봉투를 꺼냈다.

마이어가로 보낼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루시안이 언제 떠났는지 알아야겠어.’

테아노는 메이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 더 의심해야 했다고 자책했다.

늙은 태후의 병증을 다스리느라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애석하기만 하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빈 종이를 채운 뒤 반으로 접어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아니겠지. 뭐 그런 건 아닐 거야.”

‘마이어가의 은혜를 받는 입장이니 제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라비엘리의 마지막 말은 부스러기처럼 남아 테아노의 신경을 묘하게 건드렸다.

후작님의 은혜도 아니고 마이어가의 은혜라.

마이어가가 일컫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지?

테아노 마이어인가, 아니면 루시안 마이어인가.

쓸데없는 생각이라 치부하면서도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약은 바른 건가?’

테아노는 초조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젠장, 확인하고 싶어도 루시안의 방에 있으니 가볼 수도 없고.’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고는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진료 가방을 다시 발칵 열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벨라도나 잎을 한 움큼 꺼내든 테아노는 그대로 코 아래 가져다 대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곧바로 잘 말린 티티에 잎을 손으로 부순 뒤 입에 털어 넣었다.

거래가 불법인 탓에 평소라면 맛이 느껴질 만큼만 혀끝에 대었을 테지만, 지금은 원 없이 약 기운에 취하고 싶었다.

“하.”

테아노는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묻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야릇하고 나른한 기운이 퍼지자 그의 손은 자연스레 바지춤으로 향했다.

“라비엘리…….”

그녀의 이름을 입술 안에 머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하였다. 마치 주술로 불러낸 것처럼 코끝에 그녀의 향기가 맴돌았다.

“후…….”

그와 동시에 뻐근해진 아랫도리를 붙잡았다.

묵직하게 차오른 것이, 마치 라비엘리를 향한 그의 마음처럼 무겁게 내려앉는다.

테아노는 바지 속에 제 손을 넣었다. 제 몸의 일부일 뿐인데 완벽히 분리된 무언가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흐으…….”

테아노는 그것을 천천히 위로 쓸어 올리며 그녀를 떠올렸다.

아니, 사실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의 머리 위에 항상 있었다.

진주처럼 뽀얗고 흰 피부, 굴곡 없이 매끈하게 떨어지는 목선과 움푹 파인 빗장뼈, 그 아래 놓인 상냥하고 소담스러운 것.

드레스 위로 볼록하게 솟은, 물결처럼 고운 것을 만지면 어떤 감촉이 느껴질까.

그것을 지금 입에 넣으면 어떤 향기가 날까.

꿀처럼 달까, 아니면 과일처럼 싱그러울까.

한 입 베어 물면 다시는 그 어떤 단맛도 느끼지 못하게 되겠지.

아무리 진귀한 것을 먹고 마셔도 그것만큼 맛있지 않을 것이다.

동작이 빨라지자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며 다리가 뻣뻣해진다. 동시에 호흡이 가빠지지만, 숨결을 함께 나눌 이는 없었다.

그녀를 안고 싶다.

상상이 짙어질수록 테아노의 손도 빨라지고 있었다.

어금니를 바짝 깨물며 가빠진 호흡을 고른다. 그러나 라비엘리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을 떠올리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톡 터질 듯 탐스럽고 붉은 입술을 비집는다.

그럼 그녀가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내던 입술로 예쁜 짓을 하겠지.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 허리가 저릿하던 순간.

똑똑.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문이 열리고 말았다.

끼익.

“아.”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마우드 렉토르였다.

더운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있던 마우드는 하마터면 물을 전부 쏟을 뻔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얼굴색을 바꾸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와선 대야를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짓을 해선.’

마우드는 조금 전의 일을 잠깐 후회했다.

로제가 분주하게 움직이기에 몇 가지를 물었을 뿐이었다.

어쩐지 위층에서 일어난 일로 제가 주도권을 잡는 데 실패한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하던 차였다.

진료를 오신 후작의 시중을 드는 건 제가 하겠다고 나섰다.

더운물을 받아 올리면서 얼굴도장이나 한 번 찍을 생각이었지 이런 장면을 예상하고 온 건 아니었다.

‘대석학이니 뭐니 해도 남자는 다 똑같구나.’

어찌 되었든 마우드는 갓 성년이 된 어린애가 아니었다.

오페라 가수 생활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까.

‘쯧, 차라리 여자를 불러달라고 할 것이지.’

성인 남자의 성기를 처음 본 것도 아니었고.

“그럼 내려가 보겠습니다.”

마우드가 조신한 음색을 꾸며낸 뒤 고개를 조아렸을 때였다.

“잠깐만.”

테아노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네, 후작님.”

“……못 보던 하녀인데 누구지?”

그의 질문에 마우드가 입술 끝에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기껏해야 며칠 있다가 갈 건데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마우드의 시선 끝이 테아노의 바지춤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여전히 상기된 붉은 뺨과 자세가 질문의 방향을 대강 짐작하게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후작 부인이 되어 마이어가에 첫걸음을 내디디는 상상을 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은 뒤 공손한 목소리를 냈다.

“에몬 씨의 부탁으로 잠깐 엘던을 관리하러 왔지만, 사실 전 오페라 가수예요.”

“가수?”

“네.”

마우드는 가녀린 어깨를 슬쩍 들었다가 내렸다.

“에몬과는 무슨 사이지?”

“정중히 부탁하면 대가를 받고 들어주는 사이랄까요.”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테아노가 입술을 들썩였다.

“그럼 나도 정중히 부탁하면 들어주려나?”

마우드는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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