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물에 젖은 음성이 라비엘리의 손등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제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저 빨리 아래층에 내려가 누구든 불러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사람을 불러올게요.”
저 집요한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그를 마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아니.”
루시안은 처음보다 약해진 목소리로 라비엘리를 붙잡았다.
“이대로 있어요.”
“하지만.”
루시안은 말없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치마를 붙들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사이 루시안은 조금 전보다 또렷해진 정신으로 어둠의 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몸 일부분이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무모해요?”
그때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침대 위로 날아왔다.
“어떻게 검을 든 사람에게 달려들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마검을 들고 있었잖아요.”
루시안은 이번에도 별말 없이 그저 흐릿한 미소만 보였다.
그런 온화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지, 라비엘리는 처음보다 날을 세웠다.
“당신 죽을 뻔했어요.”
“…….”
“다시는 팔을 쓸 수 없을 뻔했다고요.”
라비엘리는 차마 팔을 잘라야 했을지도 몰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걸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렵게 느껴졌던 탓이다.
행여 그 사실에 놀랄까 봐, 안정을 찾아야 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봐서였다.
“엘리, 아직 감각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런데.”
“…….”
“혹시 검에 찔린 팔을 잘랐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선 그를 잠시 응시하더니 곧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세상에, 그럴 줄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일이 잘못되면 그럴 거로 생각했어요.”
“당신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겁도 없이 나섰던 걸까.
라비엘리는 황망한 얼굴로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낯선 땅에서 사내들에게 겁탈을 당할 뻔했을 때도 루시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총을 쏘았다. 그는 늘 거침이 없었고 대범했다.
주저하거나 물러서지도 않았다.
대체 무엇이 루시안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깨어났으니 난 내려가 볼게요.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그녀의 투박한 음성에 루시안이 처음보다 진해진 미소를 띠었다.
“화내지 말아요.”
“화낸 거 아녜요.”
“화난 거 같은데.”
“아니라고요.”
그 순간 루시안이 베개에 머리를 한 번 묻으며 메마른 목소리를 냈다.
“라비엘리, 잠깐만.”
“……?”
“내 손이 이상해요. 감각이 없는 것 같아.”
“뭐라고요?”
덜컥 겁이 난 라비엘리가 이불을 들치자, 알코올과 낯선 약초가 뒤섞인 냄새가 풍겨왔다.
다친 왼쪽 팔의 처치를 위해 상의는 탈의한 상태였다. 라비엘리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루시안에게 물었다.
“어느 쪽이요? 다친 팔이 그래요?”
“아뇨, 여기.”
루시안은 나른히 중얼거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그의 손을 맞잡은 라비엘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손이 이상해요? 어떻게 이상한데요.”
“아직 잘 모르겠어.”
루시안의 손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차가웠다.
“너무 차가운 것 같아요. 아무 감각도 안 느껴져요?”
“그런 건가.”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데 그래요.”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 다 괜찮을 거라 했는데, 행여 감각이 돌아오지 않거나 잘못된 것은 아닌지 몹시 겁이 났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고 차게 식은 루시안의 손을 붙들고 있을 때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루시안이 속삭였다.
“당신이 다칠까 봐 그랬어요.”
“…….”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게 무슨.”
그러고는 손을 슬그머니 돌려 라비엘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서서히 느껴지는 온기, 라비엘리는 이제 루시안의 손을 놓아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무모한 짓이었어요.”
“가끔은 무모해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가끔? 당신은 늘 무모하잖아요.”
“그랬나.”
루시안이 처음으로 어설프지 않은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라비엘리는 남은 손으로 루시안의 손을 밀어냈다.
“여기 있는 동안 명이 10년은 줄어든 것 같아요.”
“왜?”
“왜냐니, 그렇게 물어보기 미안하지도 않아요?”
“나 아직 환자예요.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요.”
루시안은 눈썹을 아래로 내리더니 라비엘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그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벽에 시선을 고정한 라비엘리가 억눌린 음성을 냈다.
“내 보호자라면서요.”
이런 식으로 말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보호자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몸을 함부로 해요?”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소리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나는 그저.”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을게. 그만 노여움 풀어요.”
“…….”
라비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루시안이 이번에는 반대쪽 팔을 슬그머니 들었다.
“이번에는 이쪽이 이상한 것 같아.”
“됐어요.”
아랫입술을 깨문 라비엘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램프는 거의 꺼져가고 있었고 루시안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퍽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남아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불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려고요.”
“아래층에요. 기름이 다 떨어졌어요.”
“괜찮아요. 곧 동이 틀 테니까.”
루시안은 이번에도 라비엘리를 붙잡았다.
그저 잠깐이면 된다고 말하고 내려가도 될 일인데, 라비엘리는 순순히 루시안의 말에 따라주었다.
“……불은 됐어. 이제 당신도 쉬어야 하잖아요.”
루시안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나른히 말했다.
그 순간, 라비엘리는 하마터면 그의 앞머리를 정돈해줄 뻔하였다.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인지 어딘가 흐트러진 머리와 표정 속에서 묘한 연민이 피어난다.
쓸모없는 감정을 지워 내려 라비엘리가 내내 감추었던 말을 꺼냈다.
“여기 테아노 후작님께서 와 계세요.”
“내가 생각보다 심각했나 보군요.”
루시안은 놀란 기색 없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더니 한쪽 눈썹을 아래로 지그시 누르며 라비엘리에게 물었다.
“……당신 괜찮아요?”
루시안이 의식을 찾기 전에는,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팔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라비엘리는 이제 와 테아노가 두렵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것이 사실이 될까 봐, 현실이 된 공포가 저를 야금야금 잡아먹을까 봐 두려웠다.
“제가 후작님을 불러달라 요청했어요.”
“라비엘리.”
라비엘리는 그 순간의 감정에 매몰되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매우 놀랐고, 당신을 걱정했으며, 이대로 죽을까 봐 무서웠다는 말 따위를 내뱉을까 봐.
“그냥. 이런 곳에서 죽는 건 너무.”
“…….”
“슬플 것 같았어요. 그것뿐이에요.”
“누가?”
“…….”
“누가 슬플 것 같은데.”
루시안은 이번에도 싱긋 웃으며 라비엘리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누워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라비엘리는 어쩐지 루시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어쨌든 당신이 깨어났으니 이제 내려가서 쉴게요.”
“고마웠어요.”
“인사는 당신 아버지께 해요.”
라비엘리는 몸을 돌리더니 곧바로 문가로 걸어갔다.
“라비엘리.”
하지만 루시안은 라비엘리를 순순히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있어요.”
그가 붙잡자 라비엘리는 잠시 멈칫하였다.
“가지 말아요.”
“…….”
“밤은 길잖아요. 조금 더 이야기해요.”
“…….”
“네? 그렇게 해줘요. 오늘은 여기 온 첫날 밤이니까.”
“…….”
“처음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늘만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줘요.”
루시안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라비엘리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가 마이어가의 저택에 처음 온 날 했던 말이었다.
“당신은 정말이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입니까?”
“아뇨, 거짓말쟁이 사기꾼 같아요.”
그녀는 불퉁하게 쏘아붙였지만, 몸은 루시안이 누워 있는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