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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76)화 (76/136)

76화

“예?”

“잘 봐둬요.”

테아노는 능숙하고도 간결한 동작으로 처치를 시작했다.

수련의처럼 등 뒤에 선 앤톨리니의 감탄 어린 호흡을 배경음 삼아서.

방 안에서는 금속성 물질이 부딪히는 소리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이 들렸고, 이따금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거기 있는 물 좀.”

“네.”

다시는 쓸 수 없을 것 같던 팔은 더는 흉물스레 보이지 않았다. 붉은 얼룩이 남아 있긴 했지만, 숯처럼 보이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그의 실력을 확인한 앤톨리니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테아노는 뒤이어 제 진료 가방을 뒤적이더니 아주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안에 든 것은 검붉은 색의 가루였다.

그는 가루를 물에 잘 개어 루시안 마이어의 입술 사이로 흘렸다.

그런 뒤 잘 말린 약초를 꺼내 머리맡에 두고 손으로 두어 번 바람을 일으켰다.

‘젠장, 귀한 약을 허비하는군.’

곱게 감긴 눈을 내려다보며 테아노는 어금니에 세게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그러고는 메스로 떼어낸 그을린 것을 거즈 위에 올렸다.

“이건 신관님께서 처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뭡니까?”

“팔에 남아 있던 마물의 찌꺼기죠. 다행히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 완전히 파고들지 못했어요. 이런 식으로 검게 탄 것처럼 모습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

“인간의 살냄새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었던 겁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별말씀을.”

테아노는 앞섶을 두어 번 툭툭 털어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누워 있었지만, 그가 곧 깨어날 것이라는 희망 탓인지 방 안의 분위기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서 눈을 좀 붙여야겠습니다. 새벽 내 달려왔더니 피곤하군요.”

후작이 어깨를 두어 번 돌리며 말하자 뒤에 서 있던 로제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네, 후작님.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반사적으로 대답했으나 로제는 뒤늦게 여관 어딘가에 있을 마우드를 떠올렸다.

분명 제가 나섰다는 걸 알면 길길이 날뛸 게 분명했다.

‘차라리 사장님께서 빨리 오시면 좋으련만.’

아마 엘던에서 벌어진 일을 듣고 달려오는 중일 것이다.

“더운물도 좀 부탁해.”

“……네, 바로 준비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누가 관리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해고한 하녀가 고작 며칠 더 머무는 문제보다 훨씬 큰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로제는 종종걸음으로 먼저 1층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동안, 테아노는 방을 빠져나가지 않고 은근히 고개를 돌려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미치겠군.’

매초롬한 얼굴과 마치 지상의 것이 아닌 듯 신성한 금색 머리칼.

지독히도 아름답다는 말은 라비엘리를 위한 것이 아닐까.

그녀와 잠시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테아노는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묘하게도 마이어가에 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저택에 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낡은 옷을 입고 있는 데다 머리 역시 손질조차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지, 이유가 뭘까.

향기 없는 꽃과 같던 그녀에게서 전에 없던 매력이 느껴진다.

‘뭔가 이상해. 얼굴도 머리카락도 그대로인데. 왜지……?’

진료 가방을 앞으로 하며 헛기침을 한 번 했을 때였다.

돌연 연기처럼 피어난 생각 하나에 테아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아침이면 의식을 찾을 겁니다. 누군가 곁을 지키면 좋겠지만.”

테아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제가 있겠습니다, 후작님.”

처치하는 동안에도 미동 없이 서 있던 라비엘리가 갑자기 나섰다.

“……르휜 양?”

“후작님께서는 쉬셔야 하고, 여기 계신 사제님과 신관님께서도 내내 고생하셨어요. 이제 좀 쉬셔야 해요.”

“하지만.”

“마이어가의 은혜를 받는 처지니 제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그저 짧은 대답만 떨어뜨리면 되는데, 테아노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뭐지?’

라비엘리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질문을 해도 늘 초조한 안색을 하고는 식물처럼 서 있었는데.

이렇게 능동적인 목소리로 제 의견을 낼 수 있는 여인이었다니.

당황한 탓에 잠시 아무 말도 못하던 테아노는 곧 깨달았다.

라비엘리가 어딘가 달라 보였던 이유.

‘가만, 저 녀석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게 아니라…….’

절대적인 아름다움.

그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내는 없다.

‘설마 같이 온 건가?’

꼬여가던 생각이 거기에 닿는 순간, 테아노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하였다.

‘아냐, 그건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두 사람이 함께 사냥터로 갔을 리도 없거니와 설령 루시안이 제안했다 하더라도 라비엘리가 따라나섰을 리 없다.

이런 생각으로 가슴을 달래려 했으나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후작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앤톨리니가 급히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고개를 돌린 테아노가 미소를 꾸며내며 대답했다.

“그럼 르휜 양께서 수고해주세요.”

“네.”

라비엘리는 이번에도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일말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다.

그녀를 데리러 르휜가의 자카린타스 성에 갔을 때-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그런데도 백작가의 영애로서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날처럼.

‘저택 밖이라 이건가?’

테아노는 진료 가방을 든 손에 힘을 한 번 쥐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 * *

램프의 불빛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기름이 거의 바닥난 탓이다.

밤새도록 방 안을 밝혔으니 이제 꺼질 때도 되었긴 했다.

라비엘리는 저 불이 완전히 꺼지고 나면 잠시라도 눈을 붙일까, 아니면 새로 기름을 받아올까를 생각했다.

멍한 얼굴로 일렁이는 불을 빤히 보았다. 모두 잠든 시각, 기름을 받아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꺼져가는 불과 함께 이 새벽을 보낸 뒤, 방 안이 완전한 어둠 속에 묻히면 그다음을 생각하기로 한다.

라비엘리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 있는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목 바로 아래까지 덮은 이불은 하도 여러 번 매만진 탓에 편편하다 못해 반질반질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제쯤 깨어날까.’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긴 했지만, 테아노를 부른 건 잘한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저 허둥대는 의사의 말대로 팔을 잘랐을지도 몰랐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테아노 마이어는 분명 훌륭한 의사였다. 그는 유능했고 뛰어났다.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새벽의 공기는 지금과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가 중요했다.

변명을 할 것인지, 아니면 그와 내내 함께 있었다는 걸 고백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물론 루시안이 깨어난 뒤에 그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였지만.

밤은 길었고 라비엘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탓에,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불안한 미래와 지독한 현실로 가득했다.

‘우선 신관님과 함께 신전에 가야 해.’

라비엘리는 클라인이 말한 ‘저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여인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동안은 잠시나마 테아노의 손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불행히도 그 역시 태후 전하의 병증을 치료하러 신전으로 가겠지만, 사람들의 눈이 많은 곳에서 저를 함부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루시안,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그를 불러보았다.

잠이 든 루시안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연을 꿰뚫는 듯한 적갈색 눈동자를 마주하지 않은 탓일까. 라비엘리는 그에게 뭐든지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루시안.”

대답이 없을 줄 안다는 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라비엘리는 나른히 힘을 풀며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당신과 있는 거…… 끔찍했지만 끔찍하지 않았어요. 괴로웠지만 동시에 괴롭지 않았죠. 좋고도 싫었고,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라비엘리는 멈출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즐거웠어요.”

그저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가, 일상이 그리웠는지도 몰랐다.

강제로 끌려와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 라비엘리는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즐거웠다는 말이 적절한 것인지 아픈 사람에게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공연히 머쓱해져 입매를 한 번 매만졌을 때였다.

편편하던 이불 끝이 한 번 들썩이는가 싶더니-

지루하게 이어지던 숨이 한 번 달싹였다.

당황한 라비엘리가 루시안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 잘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두어 번 떨리더니 적갈색 눈동자가 반쯤 드러났다.

“루시안?”

그사이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안녕,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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