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테아노 마이어 후작이었다.
‘휴, 멀미를 다스릴 시간조차 없다니.’
그가 피로가 잔뜩 묻은 면면을 들었을 때였다.
꺼져가는 램프의 불빛 아래에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한 탓인지 테아노의 두 눈이 일그러졌다.
“……라비엘리?”
테아노는 저도 모르게 라비엘리의 이름을 부르고는 곧바로 클라인을 살폈다.
‘뭐야. 라비엘리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손에 든 진찰 가방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어디에 와 있는지, 이곳이 어디인지도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이 라비엘리가 맞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테아노는 얼먹은 표정으로 클라인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어쩐지 지금이 제가 루미온 신전에서 목격했던 장면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라비엘리가 아니라 그 하녀일지도 몰라.
하지만 테아노는 곧 제가 얼마나 한심한 망상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멍청하긴. 분명 라비엘리가 맞아. 하지만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러다 문득 누군가 루시안의 사고 소식을 마이어가로 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건가? 이 녀석 때문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속만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신전을 떠나오면서부터 품었던 물음과 새롭게 피어난 의문을 해소해줄 사내는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숨은 쉬는 것인지 확인해봐야 할 것처럼 가만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설마 신관에게 저 녀석이 내 아들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한 건 아니겠지.’
테아노는 클라인을 한 번 힐긋거렸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신관님, 여기서 또 이렇게 뵙는군요.”
가벼운 농담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환기하는 거라 생각한 클라인이 테아노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후작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당연한 일을요.”
“사촌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용기 있게 행동하시다 그만.”
클라인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지만, 오히려 테아노에게는 안도감을 주었다.
‘사촌으로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복잡하게 뒤엉켜 있던 감정 한 가닥이 풀린 것 같아 테아노의 낯빛은 처음보다 가벼워졌다.
‘그럼 라비엘리는 누구로 알고 있을까.’
테아노는 침대 가까이에 서 있는 여인을 마주했다.
“여기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부러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
두 눈은 라비엘리에게 향해있었으나, 사실 신경은 클라인에게 가있었다.
공연히 라비엘리에게 하대했다가 이상한 말이 퍼지면 곤란할 터다.
“후작님.”
라비엘리도 얌전한 얼굴로 예를 갖추었다.
두려움이나 놀란 기색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그녀의 태연한 반응에 당황스러운 건 테아노였다.
라비엘리는 마이어가의 저택에 있을 때도 저를 마주할 때마다 멈칫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제게 곁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지 않았다.
소유욕과 우월감, 제가 만들어낸 왕국 속에서 라비엘리가 르휜가의 품위를 잃어가는 걸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라비엘리의 그림자가 점점 작아져 끝내 제 손아귀에 쏙 들어오길 기다렸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테아노는 라비엘리를 빤히 보았다.
속내와는 다른 말을 한 탓인지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귀한 영애께서 어쩌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라비엘리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테아노에게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의미인지 뒤로 물러서서는 클라인의 옆에 섰다.
그녀의 행동은 테아노를 묘하게 자극했으나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여기에 왜 있는지 묻고 싶은 마음 역시 굴뚝 같았지만, 테아노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제 아들이라 주장하던 청년은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이불을 들추자 곧 새카맣게 타버린 것 같은 팔이 드러났다.
하지만 테아노는 별다른 반응 없이 환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르휜 양, 대야에 차가운 물을 좀 받아다 줄 수 있겠습니까? 여기 관리인에게 남는 램프가 있으면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도 해줘요.”
석탄산을 꺼내 뚜껑을 열며 테아노가 말했다.
“네.”
라비엘리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테아노는 본격적으로 처치를 시작했다.
상처는 얼핏 까다로워 보였으나 문제없을 것 같았다.
‘의식을 찾는 데 이만한 게 없지.’
한쪽에 늘어놓은 예리한 도구를 석탄산으로 소독하던 손길이 차츰 느려지고 있었다.
‘잠깐.’
테아노는 저를 조금도 닮지 않은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 적갈색 눈동자를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제노베파와도 닮지 않았어.’
은은한 갈색 머리,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생기가 느껴지는 붉은 입술과 시원하게 뻗은 콧날까지.
아들이라고 하기엔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테아노는 무심코 손을 뻗어 루시안의 뺨을 만져 보았다.
여인이라도 해도 믿을 법하게 부들부들한 살결-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아냐…….’
그는 분명한 증표를 들고 있었지만, 오직 그것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증표야 전달을 받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래, 다른 누군가에게 받았을지도 모른다.
의문이 진해지자 테아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넘겼다.
마이어가의 사람이 아닌데 내가 굳이 애를 쓸 필요가 있을까.
내가 굳이 살릴 필요가 있나.
꼭 살려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여기서 루시안을 살린다면 번거로운 일만 이어질 것이다.
루시안은 발톱을 숨기고 있다.
어쩌면 오늘,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학위를 받으며 신 앞에서 맹세한 일에 어긋났으며 의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예정에도, 미래에도 없었을 아들의 존재는 그의 삶을 몹시도 무겁게 만들었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안위가 아닌가.
다소 비윤리적인 행동이긴 해도 그것으로 내 삶이 편안해질 수 있다면.
나는 앞으로도 큰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대의를 위한 일이다.
메스를 소독하던 손이 천천히 멈추었을 때였다.
똑똑.
돌아서지 않는 테아노의 등 뒤로 라비엘리와 로제가 들어왔다.
로제가 차가운 물이 담긴 대야를 침대 옆에 두자 라비엘리가 램프를 내려놓고 불을 밝혔다.
그녀가 순식간에 환해진 침대 주변을 벗어나는 사이, 의사가 허겁지겁 뒤따라 들어왔다.
“오, 세상에.”
의사는 테아노의 뒷모습을 보고 감격한 듯 두 손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살아생전 후작님께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떨리는 호흡 속에 섞어 흘린 음성이었으나, 방 안이 워낙 조용한 탓에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더하여 테아노의 귓가에도 명확하게 들어왔다.
그러고는 이어진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 등 뒤에 느껴지는 기시감에 테아노는 미간을 한 번 좁혔다 편 뒤 고개를 돌렸다.
테아노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의사는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안았다.
“후작님, 안녕하세요. 저, 저는…… 그러니까 지금 이런 인사를 드리는 게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는 손을 옷에 두어 번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앤톨리니 셀번입니다. 아, 알톤에 있는 진료소에서 일하고 있어요.”
“테아노 마이어입니다.”
앤톨리니는 제 오른손을 한 번 지그시 쳐다본 뒤, 의사로서의 본분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환자는 보셨습니까?”
“네, 지금요.”
“전 이렇게 감염이 심한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절단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악마의 기운이 서렸다고 하니 차라리 그렇게 해서 불에 태우면.”
거기까지 말한 앤톨리니가 라비엘리와 클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습니다만, 최선은 아니겠지요.”
“흠.”
“후작님께서 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이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신의라 불리는 분의 시술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
“후작님께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영광을, 아니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테아노는 별말 없이 입꼬리만 슬며시 들었다.
곤란하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든 루시안을 깨우지 않고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동경하는 시선이 저를 지켜보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서 루시안을 살리지 못하면 이 말 많은 사내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퍼트릴지 몰랐다.
테아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저를 지켜보는데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었다.
‘젠장.’
테아노는 내려놓았던 메스를 다시 집어 들었다.
“셀번이라고 했나요?”
“아아, 앤톨리니라고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그래요, 앤톨리니.”
테아노는 소매를 슬그머니 걷어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팔이 전부 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