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테아노는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탓에 활자가 흔들려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무릎 위에 놓인 책은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어야 했지만, 테아노는 서적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그는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었다.
활자에 꽂힌 것도, 여백을 응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리하지만 황폐한 눈빛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녀석이 대체 왜 거기에 있는 거지?’
테아노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했을 때 클라인이 보낸 사제가 루미온 신전에 도착했다.
아마 마이어가의 저택이었다면 돌려보냈을지 몰랐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마주한 사제는 몹시 지친 행색이었다.
더하여 그가 전한 말은 테아노의 정신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누구? 누가 엘던에 있다고요?’
‘루시안 마이어요. 마검에 찔려 의식이 없습니다.’
테아노는 그길로 옷을 둘러 입고 떠날 채비를 했다.
사제에게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급히 필요한 약재와 진료 도구를 가방에 넣었다. 근심 어린 눈빛과 적당히 굳은 표정을 짓고 있을 즈음에는, 어느샌가 마차에 올라 있었다.
사제가 옆을 지키는 탓에 위급한 척 움직이긴 했으나 사실 테아노는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민 상태였다.
루시안이 마검에 찔려 위중하다는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내가, 내가 시킨 일은 어쩌고?’
테아노는 마이어가를 떠나기 전날 밤을 반추했다.
조약돌처럼 매끈한 얼굴의 사내는 어쩌면 낯뜨겁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제 요구를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받아들였다.
‘2주 동안 하루도 거르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만든 약인데……!’
라비엘리의 불감증을 치료할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기회를 이런 식으로 날리게 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들로 제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면 현명하게 행동했어야지.
테아노는 반듯하게 서서 제 말을 듣던 루시안을 떠올리며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사냥을 하러 가다니.’
녀석이 괘씸해 견딜 수 없었다.
‘못난 놈 같으니. 제대로 해냈다면 인정받을 좋은 기회였거늘.’
차라리 라비엘리를 데려갔어야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신전 근처에 묵게 하고 밤마다 찾아갔으면 될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눈에 띄면 몹시 곤란했겠지만, 그랬다면 허공에 돈을 날리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아니다. 그랬다가 소문이라도 났다면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지. 어차피 데려올 수는 없었어.’
그는 결국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탁.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길 상태가 좋지 않네요.”
사제 도슨의 말에 테아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은 고래 배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어둡고 음습했다.
한동안 차창 너머를 응시하던 테아노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거의 다 왔습니다, 후작님.”
“엘던은 에몬 질의 여관입니다. 그에게도 이 사실이 전해졌습니까?”
“네, 지금쯤이면 아마 연락이 닿았을 겁니다.”
“그렇군요. 불법으로 마물을 소유한 사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날이 밝는 대로 조사할 예정입니다.”
마차 안의 램프가 일렁이며 눈앞에 앉아 있는 사제의 얼굴을 어딘가 기이하게 보이게 했다.
그러자 두려운 동시에 돌연 흥미로운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 녀석, 정말 악마를 마주했을까.
“사제님.”
“네, 후작님.”
한동안 말이 없던 테아노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 뭐든 말씀하십시오.”
“도착하거든 급한 처치를 마친 뒤에, 편지 한 통 전달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전해주시면 날이 밝는 대로 부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테아노는 머릿속으로 집사 메이든에게 보낼 편지 내용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보낸 편지에 답이 오지 않아 궁금하던 참이었다.
라비엘리는 어떻게 지내는지, 메이지는 손가락이 부러졌나 왜 아무 말이 없는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루시안은 언제쯤 갈라테이아로 떠났는지도 물을 작정이었다.
‘설마 내가 떠나고 바로 갈라테이아로 간 건 아니겠지?’
테아노는 루시안에게 내밀었던 갈색 약병을 생각하며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아냐, 설마 그랬으려고. 며칠이라도 약을 발랐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테아노는 라비엘리의 아름다운 얼굴을 상상하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차는 점점 엘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같은 시각, 클라인은 눈을 감은 채 벽면에 기대앉아 있었다.
소란스레 움직이던 의사도, 초조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하던 사제들도, 멈춰버린 시간 속에 놓인 듯했다.
어둠이 낮게 깔린 공기 속에서 오직 루시안만이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사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한계를 인정하고 돌아섰으면 헛수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와 발을 뺄 수도 더 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어 곤란했다.
다만 현시점에서는 곧 테아노 마이어 후작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로였다.
그러던 중 지친 의사와 사제들을 아래층으로 내려가게 한 건 클라인이었다.
어차피 모여 있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체력을 아끼자며 고집을 부리는 사제들도 전부 내려보냈다.
방을 지키던 자들이 하나둘 빠져나갔지만, 라비엘리는 여전히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몸과 영혼이 낙엽처럼 말라보였지만 표정만큼은 의연하였다.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클라인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르휜 양, 내려가서 좀 쉬어요.”
걱정하는 마음이야 알지만 곁을 지킨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창백한 것이 라비엘리 역시 위태로워 보였다.
“괜찮아요.”
클라인은 라비엘리의 눈이 내내 루시안에게 향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대답 후 클라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왜 이런 곳에 와 있었을까.
하녀 한 명 없이 외딴 여관에 있는 것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던 찰나였다.
‘후작님의 아들과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겠구나.’
주제넘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클라인은 이 가여운 여인이 안정된 삶을 살길 바랐다.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눈썹 사이에, 입술 끝에 숨어 있는 우울이 사라지길 바랐다.
그것은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클라인은 그녀의 얼굴 속에서 자꾸만 레브리안을 찾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레브리안이 겹쳐지는 걸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주저하던 클라인이 맞잡았던 손에 은근히 힘을 준다.
“르휜 양.”
“네.”
“헤르젠 루즐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지요?”
갑자기 시작된 클라인의 질문에, 라비엘리는 그가 조금 전 맺지 못한 대화를 이어가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네,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이런 말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클라인은 마지막까지도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문을 이어갔다.
“제가 아는 사람과 르휜 양이 몹시 닮았어요.”
맥락 없는 말에 라비엘리는 무어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니까 마치 자매라고 느껴질 만큼.”
편편하던 라비엘리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 들었다.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기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몸이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죠? 제가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루미온 신전에 있습니다.”
“신전…….”
라비엘리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풀었다.
“고맙습니다, 신관님.”
기대하지 말자고, 아닐 확률이 높다고 되뇌면서도 라비엘리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아닙니다. 여기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마이어가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신관님. 제가 신전으로 갈게요.”
기대하지 않겠노라 마음을 붙들었지만 라비엘리는 조급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하지만.”
물기 어린 눈동자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눈썹이 보다 선명히 레브리안을 떠올리게 했다.
“신관님, 여기서 로튼으로 가는 것보다 오스트린이 훨씬 가까우니까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르휜 양이 괜찮으시다면.”
클라인의 대답을 듣자 안심이 되는 모양인지 라비엘리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함께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누워 있는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다시 눈을 떠 함께 신전으로 향할 수 있다면, 그보다 다행인 일은 없을 거로 생각하며.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투박한 발걸음 소리 끝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