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마우드가 계단으로 고개를 내밀자,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사내가 우당탕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헐떡이면서도 호흡을 고를 새도 없이 급박한 음성을 냈다.
“창고가 어디 있습니까?”
의사가 물었지만, 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른 주먹을 한 번 꽉 쥔 뒤 조용히 비켜서서 마우드를 눈짓했다.
마우드는 당혹스러웠지만 도도한 표정을 잃지 않으며 물었다.
“로제, 창고가 어디에 있지요?”
그녀의 물음에 로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마우드가 인상을 구깃거렸다.
“잠겨 있나요? 열쇠는?”
그러더니 순서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직도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지요?”
마우드의 말에 의사가 움푹 파인 미간에 있는 대로 힘을 주었다.
그러더니 로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가씨가 여기 관리인 아닙니까? 빨리 창고 열쇠를 줘요.”
“아녜요. 오늘부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바로 엘던의…….”
“아니, 당신이 말해요. 여기 창고에 약재가 있다면서요. 상황이 급하다고요.”
의사가 재촉하자 로제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제는 마우드의 눈치를 보느라 곧바로 말문을 열지 못했다.
더하여 오전의 일이 안개처럼 피어났다.
‘뭐야, 내 약재에 손을 댔어? 설마 카시아 잎을 가져다 먹은 거야?’
‘다 죽어가는 걸 데려다가 편하게 여관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돈까지 버니 이제 보이는 게 없나 보지?’
‘네 아비가 진 빚 때문에 어떻게 살았는지 잊었어? 다시 사창가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월급 주고 인간 취급해 주니까 진짜 인간이라도 된 줄 알아?’
에몬의 허락 없이 창고 문을 열어주고 약재를 쓰게 한 것이, 엘던을 떠나게 된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끔찍한 폭언만 남긴 채 떠나고 없지만, 아침의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오금이 저렸다.
‘아냐, 어차피 그만둘 거잖아. 알 게 뭐야. 중요한 건 지금 신사분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가 필요한 거잖아.’
위층에서 떨고 있는 라비엘리와 루시안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을 굳힌 로제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신사분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 어떻길래 그래요?”
“아직 모릅니다. 그리 희망적인 상태는 아니에요. 일단 부인께서 여기 에몬 씨의 약재 창고가 있다고 해서 내려왔어요. 제가 가져온 연고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요.”
“하지만 아침에 사장님께서 창고에 있는 약재를 거의 다 가져가셨어요.”
“뭐라고요?”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마차 한가득 실어 가셨으니 꽤 많이 가져가신 것 같은데…….”
“이런, 그럼 일단 남은 거라도 확인해보겠습니다.”
의사의 말에 로제가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서는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로제가 열쇠를 손에 집어 든 순간이었다.
멀찍이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마우드가 나섰다.
“잠깐만요!”
“……?”
“오늘부터 엘던의 관리인은 저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러고는 로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손님에게 창고 열쇠를 드리기 전에 우선 내게 말해봐요. 뭐 말하는 걸로 봐선 의사신 것 같은데 맞나요?”
마우드의 말에 의사는 한숨을 한 번 푹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위층에 환자가 있는 건가요? 관리인은 저니까 앞으로 제게…….”
“이봐요, 아가씨. 나는 댁이 누군지는 관심 없으니 빨리 창고를 열라고요!”
의사의 말은 마우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여기까지 온 것도 짜증 나는데, 이런 시골 촌뜨기들에게 무시당한 것 같아 불쾌함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요. 우선 내게 자세히 말해요. 이 창고, 에몬의 창고라고요. 함부로 열어줄 수는 없습니다.”
마우드의 말에 사내는 다시 로제를 쳐다보았다.
로제는 카운터 위에 열쇠를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단단한 음성을 냈다.
“렉토르 양.”
로제가 저를 빤히 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자, 마우드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딘가 달라진 기운에 뭐라 반응도 못 하고 커다란 눈만 끔벅였다.
“위층에 환자가 있냐고요? 네, 있어요.”
“……아니, 내 말은.”
“그분은 평범한 환자가 아녜요. 여기 계신 훌륭한 선생님조차 당황하고 계실 만큼이요.”
“…….”
로제의 말에 마우드는 의사를 한 번 힐긋거렸다.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더니 길고도 낮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이 코딱지만 한 여관에서 그렇게 다칠만할 일이 뭐가 있어?”
되는대로 내뱉은 마우드는 문득 이곳이 사냥터 인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뭐 오발탄에 누가 맞기라도 했어요?”
“차라리 오발탄 사고면 낫겠군.”
의사가 신음처럼 흘린 말에 마우드가 입술을 얄궂게 비틀었다.
“대체 뭔데 그래요? 로제, 내가 분명히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걸 제일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마우드의 날 선 음성에 로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손가락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그러지 말고 관리인님께서 직접 올라가 보시는 건 어때요?”
“……뭐?”
호기심이 일긴 했으나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아픈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도, 여기서 더 소모적인 언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됐어요. 아픈 사람이 있다는데 어쩔 수 없군요. 에몬에게는 내가 잘 얘기하지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어줄 테니까. 그리고 열쇠는…….”
마우드가 로제에게 손바닥을 내보였을 때였다.
“위에서 누가 악마를 부르는 소환술을 했어요.”
로제가 창고 열쇠를 그녀의 손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미 위에서 모든 정황을 들은 의사는 그저 마른침만 한 번 삼킬 뿐이었지만, 마우드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뭐, 뭐라고요?”
“그리고 투숙객 중 누군가 악마가 씐 단검에 찔렸죠.”
로제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잠자코 있던 의사가 조용히 나섰다.
“아무래도 역병을 퍼트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팔 한쪽이 완전히 불에 탄 것처럼 변한 데다 지독하게 썩은 내를 풍기고 있거든요. 아마 저대로 둔다면 온몸에 퍼질 겁니다.”
“……퍼지다니, 뭐가요?”
“마물에 희생당한 육신을 살려내지 못하면, 결국 육체를 집어삼키고 그 기운이 침대로 바닥으로, 다른 희생자를 찾아 계속 퍼질지도 모르죠. 저대로 두면 이 엘던 전체가…….”
마우드는 저도 모르게 입과 코를 막았다.
손바닥에 난 땀 때문인지 장갑이 몹시 답답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로제가 건조하게 마우드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렉토르 양.”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묻자, 마우드는 손에 든 열쇠를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당장 창고 문을 열지 않고 뭐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