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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70)화 (70/136)

70화

“네, 신관님.”

클라인은 어떤 식으로 말을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머릿속은 몹시 혼란스러웠고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우선 라비엘리의 잃어버린 동생에 관한 것을 자세히 듣고 싶었다.

동시에 에몬의 사악한 행실에도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어찌 그런 끔찍한 짓을.’

겨우 일곱 살 어린 사내아이를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부분에선 바닥에 쓰러지듯 엎드린 사내를 위해 다시 뭐라도 소환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잠깐, 생각해 보니 레브리안이 결혼해주면 아버지의 빚도 갚아주겠다고 했지.’

만약 레브리안이 결혼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녀 역시 노예 시장에 팔아버리겠다고 나설지도 몰랐다.

혹은 그보다 더 끔찍한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에몬의 추악한 실체를 마주하고 나자 온몸에 힘이 풀린 것처럼 허망하였다.

그러나 이대로 우울한 감정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다.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이 있었으니까.

‘정말 이 여인이 레브리안의 가족일까.’

클라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라비엘리를 응시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꺼내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그것에 대해 다시 묻는다는 건 결국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니 말이다.

주저하던 클라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전 오스트린의 루미온 신전에서 온 클라인 이온입니다.”

클라인의 말에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오스트린?’

오스트린의 루미온 신전이라면 테아노가 있는 곳이었다.

신전에서 요양 중인 태후의 병증을 치료하러 가지 않았던가.

‘하필이면.’

라비엘리는 고개를 슬쩍 숙였다가 들었다.

그가 제 이름을 밝혔으니 저 역시 이름을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눈앞의 신관이 신전으로 돌아가 후작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진 않을 것 같았으나 이름을 밝히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 죽은 듯 누워 있는 루시안에게로 시선이 갔다.

어쩌면,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숨기고 감추기에는 너무 늦었을지도.

메이지에게 편지를 쓰기에도, 그저 가벼운 일탈로 감추기에도 너무 멀리 왔다.

게다가 이미 로제에게 홀린 듯 제 상황을 털어놓은 상황이 아닌가.

라비엘리는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클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을 굳히고 나자 저를 드러내는 일이 처음처럼 끔찍하거나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테아노에게 들켜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알 수 없는 용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제 안에서 뒤섞이는 혼란스러움을 감추며 라비엘리가 말했다.

“라비엘리 르휜이에요.”

그 순간 편편하던 클라인의 얼굴에 묘한 기운이 어렸다 흩어졌다.

‘르휜?’

르휜가라면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의 몰락. 다만 클라인이 사는 오스트린에는 그저 확인이 불가능한 말들만 돌았다.

자카린타스 성은 공중에서 분해되었고 르휜가의 자손은 행방을 알 수 없다더라, 롭에 있는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더라, 늙은 남작에게 시집을 갔더라는 둥 소문만 무성했는데.

비극적으로 유명을 달리한 백작의 외동딸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르휜 양.”

클라인의 얼굴에 스친 것이 당혹감이라는 걸 깨달은 라비엘리는 그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전부 지난 일이니 그리 가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관님.”

“루미온 님의 자비로움이 늘 함께하길 기도하겠습니다.”

그의 온화한 음성에 라비엘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예를 갖춘 라비엘리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신관님.”

조심스레 클라인을 불렀다.

“저를 돌봐주시는 후작께서 지금 루미온 신전에 계세요.”

그녀의 말에 클라인은 곧바로 테아노를 떠올렸다.

“마이어 후작님 말씀이십니까?”

“네, 그분께서 제 후견인이세요.”

“아, 정말 다행이군요.”

클라인은 진심으로 안도하였다.

이 가여운 여인이 행여 여관을 전전하며 괴로운 삶을 사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라 생각하며.

테아노라면 대석학인 데다 유능한 의사니 라비엘리를 잘 돌볼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이분은.”

라비엘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테아노는 루시안이 제 아들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

게다가 아들이라는 말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불분명했다.

지금껏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걸 보면, 충분히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후작에게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테아노는 루시안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후작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과 이 사실들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눈앞의 신관이 믿을만한 자라는 걸 확인할 수만 있다면.

“신관님,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나요?”

갑작스러운 말에 클라인은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침묵하는 것은 신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작과 몰락한 가문의 여인, 그리고 젊은 사내 (그것도 몹시 매력적인)는 그리 안전한 조합이 아니라는 예감이 밀려왔다.

“네.”

클라인은 진중한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믿음을 주려 성호를 그을 수도 있었으나 부러 하지 않았다.

대신 라비엘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호흡을 고른 라비엘리가 닫힌 문을 한 번 힐긋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분은 루시안 마이어, 지금으로선 후작님의 유일한 후계자예요.”

라비엘리의 말에 클라인은 표정 변화 없이 되물었다.

“아드님이란 말씀이십니까?”

“네.”

머릿속에 여러 가설이 떠돌았으나 클라인은 말을 아꼈다.

테아노에게 후사가 없다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니.

“이분이 마이어 후작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비밀이라는 뜻입니까?”

“네, 맞아요. 후작님께서는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하지 않으셔요.”

“그런데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클라인의 질문에 라비엘리가 침착하게 말했다.

“곧 의사가 와서 상태를 보겠지만, 혹시 치료가 어렵다고 하면 후작님을 이쪽으로 모셔왔으면 해서요.”

“…….”

그제야 라비엘리의 의도를 이해한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아노의 사생활에 관해선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으나 그의 의술만큼은 제국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클라인의 대답을 듣자 라비엘리는 어쩐지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테아노를 부르는 상황만큼은 오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복잡한 상황과 사람들이 뒤엉킨 곳에서 그를 마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이제는 얌전히 저택에 있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상황, 뭐가 되었든 테아노와 맞서야 하는 건 맞았다.

라비엘리가 속내를 정리하며 루시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르휜 양.”

이번에는 클라인이 그녀를 불렀다.

“실례인 줄 알지만,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하지만 운을 띄워놓고도 선뜻 질문하기 어려웠다.

라비엘리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상흔일 터, 죄책감으로 무너진 가여운 바이젤을 위해 어렵게 꺼낸 과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확실하지도 않은 의구심만으로 그녀에게 다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가기에 르휜 양은 레브리안과 너무 닮았어.’

어둠 속에서 빛처럼 느껴질 만큼 환한 백금발 머리는 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머리카락 색만 닮았다고 해도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는 사안인데,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역시 몹시 흡사했다.

클라인은 레브리안을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보아왔다.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해- 그는 레브리안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힘들게 살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데 얼마 전 모녀를 버리고 떠났다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레브리안과 자매라면, 이 여인도 그를 알고 있을까?

혹시 아버지라 주장하는 주정꾼 사내가 어린 레브리안을 백작가에서 납치한 건 아닐까?

“아주 어렸을 때 동생을 잃어버리셨다고.”

클라인의 질문에 라비엘리는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라비엘리는 신관의 질문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상황에서 제 잃어버린 동생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닌 탓이다.

불길한 의문이 솟았으나 우선 순순히 대답하였다.

“네, 맞아요. 그런데…….”

라비엘리는 뒷말을 흘리며 클라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대리석처럼 매끈하고 아름다운 얼굴 속에선 어떤 표정도,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레브리안 루즐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클라인의 질문에 라비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헤르젠 루즐이란 사람은 아십니까?”

“아뇨,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라비엘리의 대답에 클라인은 입술을 한 번 꼭 붙였다.

어렸을 때 잃어버렸다고 했으니 이름이야 바뀌었거나 모를 수 있다.

그렇다면 헤르젠은, 그 끔찍한 사내는 대체 누구인가.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때, 클라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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