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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69)화 (69/136)

69화

“이야기를 나누다니요.”

라비엘리의 말에 클라인이 눈썹 사이에 힘을 주며 되물었다.

그녀가 들어오기 전, 상황이 종료되고 사제들이 후처리하는 동안에도 클라인은 바이젤이 끝마치지 못한 주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주는 분명 에몬 질을 향한 것이다.’

바이젤의 입에서 에몬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클라인의 사고는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루시안과는 달리, 당혹스러움에 두 다리가 굳어버린 것이다.

에몬 질, 그것은 클라인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이름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에몬에게 저주를 건 것일까.’

이유도 궁금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 에몬에게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머리카락 색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노라 말했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뭐 어떻습니까? 창부라도 상관없어요.’

그런데도 클라인의 마음 한구석에는 에몬이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진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에몬과의 대화 속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클라인의 마음을 완전히 짓밟는 말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저주라니.

누군가 그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니.

만에 하나 레브리안이 그의 곁을 지킨다면, 그녀 역시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복수는 늘 그렇게 몸집을 키우고 주변인들까지 잡아먹는 법이니까.

‘안 돼, 절대 안 돼.’

클라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에몬의 얼굴을 지워냈다.

그가 레브리안의 곁에 서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신관님……?”

그때, 라비엘리가 조심스레 클라인을 불렀다.

얼굴에 피어나려는 불쾌함을 누르며 그녀를 마주하자, 라비엘리가 다시 한번 말했다.

“잠깐이면 돼요. 이분께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하지만 이자는.”

그녀의 청에 클라인은 난색을 보였다.

지금이야 나약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지만, 에몬에게 저주를 걸기 위해 악마를 소환한 위험한 자였다.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었다.

“잠깐이면 돼요.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클라인이 머뭇거리는 사이, 바이젤은 떨구었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오직 절망만이 가득하였으나 묘하게도 제게 원망을 쏟아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바이젤은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의지를 잃은 듯 보였다. 돌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위험한 행동을 한 자였다.

다른 사제들을 전부 물린 뒤 클라인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사제들이 전부 밖으로 나가자 방 안에는 음울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훌쩍임도 잦아들고 살기 어린 연기조차 제법 가라앉았을 때, 라비엘리가 바이젤을 내려다보았다.

양 볼이 오목하게 파일만큼 마른 데다 거친 피부는 그가 살아온 삶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했다.

원만하지 않았을 인생- 처음부터 악마의 손을 잡으려 하진 않았을 터다.

이제 와 그의 사정을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가 사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 역시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라비엘리는 바이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의 절망과 우울을 보듬을 생각까지는 없었으나,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루시안이 쓰러진 이상 당장 이곳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가 걱정되는 마음이 절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 절반이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라비엘리는 뭐든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시안과 저를 지킬 방법은 많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지금의 소동이 에몬 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더더욱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라비엘리의 건조한 음성에 바이젤은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들었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입술을 우물거렸다.

마치 말하는 법을 잃은 아이처럼 주저하던 바이젤은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네 음절을 꺼냈다.

“피카르디.”

“피카르디라면 훌륭한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그녀의 질문에 바이젤은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피카르디는 가장 더운 달과 추운 달의 기온 차가 적고 일조량이 풍부한 땅이었다.

작지만 평화로운 곳에서 온 사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들어본 적 있어요. 당신도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나요?”

바이젤은 이번에도 느릿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군요.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라비엘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난 뒤였다.

그때까지도 잔뜩 웅크리고 있던 바이젤이 느리게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포도뿐 아니라 뭐든 뿌려 놓으면 잘 자란다고 해서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고 불렸지요. 거긴 농사꾼들의 천국이에요.”

“그렇군요.”

당신에게도 그곳이 계속 천국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비엘리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되뇌었다.

천국을 벗어나 이곳에 왜 왔는지, 에몬에게 왜 저주를 걸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미안합니다.”

바이젤이 먼저 무거운 음성을 떨구었다.

“이제 와 이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

“아내가 죽고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어요.”

이후 바이젤이 꺼낸 말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그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가엾게 느껴질 만큼.

바이젤이 말을 잇는 동안, 라비엘리는 눈앞에서 스러져간 르휜가의 사람들과 영원히 마주할 수 없는 부모님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죽음의 끝에서 마주한 동아줄,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 악마의 손길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비엘리는 바이젤의 그림자 속에서 과거의 제 모습을 발견했다.

유일한 길이자 구원이라 생각했던 것은 결국 저를 끔찍한 악몽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바이젤도 그저 방법이 이것뿐이라 믿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들이 어디 있는지 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바이젤은 죽은 듯 누워 있는 루시안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본래 악한 자가 아니었다. 악마의 꾐에 넘어갔으나 에몬이 말했듯 누군가를 해하기는커녕 벌레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흑, 흑.”

바이젤은 다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다고, 복수라는 단어에 이성을 잃은 제가 한심했다.

저를 막느라 희생양이 된 사내와 그의 연인처럼 보이는 여인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부질없고 멍청한 생각이었습니다.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이 이름이 뭔가요?”

라비엘리가 묻자 바이젤의 턱 끝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터져버린 울음을 억지로 삼켜내고 있었다.

“알릭스. 알릭스 루오예요.”

“알릭스…….”

라비엘리는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듯 한 번 조용히 읊조리더니 그를 쳐다보았다.

“가족을 잃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잠든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본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손을 써 볼 겨를도 없이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었어요. 가족을 따라 죽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럴 용기도, 힘도 남아 있지 않았죠.”

그 순간 클라인의 표정에 미묘한 균열이 일었다.

그는 가만히 눈동자만 굴려 라비엘리를 보았다.

“그리고 당신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제게도 잃어버린 가족이 있어요.”

라비엘리의 말에 바이젤이 얼굴을 닦아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잃어버린 가족이요?”

행복했을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동생의 잔상, 라비엘리는 그 작고 어린 소녀의 얼굴을 한시도 잊은 적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동생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생사도 모른 채 그저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요.”

“…….”

“만약 내게도 그런 유혹이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 쉽게 거부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을 원망할 수가 없어요.”

라비엘리는 돌연 왈칵 차오르려는 슬픔을 누르려 가슴에 손을 올렸다.

“어머니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저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요.”

“아아……!”

바이젤이 투박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을 때,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클라인이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 바이젤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비엘리와의 짧은 대화가 그에게 위안을 준 것인지, 처음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보잘것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사이 문이 열리고 사제들이 들어왔다.

바이젤은 라비엘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쾅.

모두 나갔을 거로 생각한 라비엘리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부인.”

뜻밖의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흰 사제복을 입은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눈에 무수한 감정을 담고 있는 클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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