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홀로 남은 라비엘리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가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건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눈과 여린 호흡뿐.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는 사내들의 음성은 애써 가라앉힌 마음을 흐트러뜨렸다.
불안은 끝없이 커져갔고, 감정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라비엘리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더는 홀로 무거운 공기를 견딜 수 없는지 라비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 근처로 걸어갔다.
발목의 통증은 잊은 지 오래였고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희미하게 느껴졌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평소와 다른 음성에 머뭇거리고 말았다.
그때 멈추지 않고 달려갔더라면 지금 곁을 지킬 수 있었을까.
쓸모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라비엘리는 내내 저를 자책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면 이토록 괴롭지만은 않을 텐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지금처럼 초조하지는 않을 텐데.
‘너무 놀라지 마요, 레이디.’
단검에 팔을 베인 순간에도,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루시안이 남긴 마지막 말은 라비엘리를 위한 것이었다.
‘놀라지 말라니.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테이블 근처를 서성이던 라비엘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문가로 향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올라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닫힌 문을 열어젖히자 어딘가 평소와 다른 음산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윽.’
라비엘리는 옷소매로 코를 막은 뒤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신성력이 없는 그녀조차 마룻바닥에 자욱하게 깔린 서늘한 음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불길한 예감이 전부 틀리기를 바라며,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301호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루시안.”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라비엘리는 제 반응이 두려움이라 생각했다.
이건 전부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를 걱정해서도, 동정해서도 아닌 그저 공포에 짓눌렸기 때문이라고.
주저하던 그녀가 문고리를 슬며시 움켜쥐었을 때였다.
돌연 안에서 둔탁한 걸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라비엘리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선 순간 문이 열렸다.
“……!”
라비엘리는 벌어진 틈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으려 했으나, 곧이어 나온 사내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지친 표정이 역력한 그는 오스트린에서 온 신관 클라인이었다.
“다 끝난 건가요? 이제 괜찮은 건가요?”
라비엘리의 질문에 클라인은 높낮이가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관의 대답은 라비엘리의 불안을 완전히 해소해주지 못했다.
우려했던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악마의 부활이나 역병의 시작이라면 다행이었으나 라비엘리가 먼저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었다.
“루시안은요? 그는 괜찮은가요?”
신관이 우려하던 일 속에 분명 루시안의 안위도 있을 것이다.
제발, 그가 무사하길 간절히 바라며 라비엘리가 손에 힘을 잔뜩 준 순간이었다.
“아직 모릅니다. 검에 베인 상처가 심한 데다 그의 피를 제물로 악마가 깨어났어요.”
“……뭐라고요?”
“다행히 주문을 끝까지 읊기 전에 부군께서 막아서 완전히 부활하진 못했습니다. 역병의 씨앗을 뿌리는 것도요. 사제들이 마물은 안전하게 처리했으니…….”
“루시안은요. 그럼 루시안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의 피를 제물로 삼았다니요.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라비엘리가 다급히 묻자 클라인이 어깨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아직 의식이 없습니다. 우선 베인 상처가 심하니 의사를 불러야 할 겁니다.”
“제, 제물로 삼았다는 건 그의 영혼이…….”
라비엘리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오래전, 영혼을 잃은 육신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죽어도 완전히 죽은 게 아닌 것- 어둠과 맺은 계약의 대가는 비참한 결과뿐이다.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일단 깨어나는 걸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더는 참을 수 없어진 라비엘리는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익-
방 안은 온통 검고 짙푸른 연기로 가득했다.
매캐한 냄새에 라비엘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코를 막았다.
고개를 숙이자, 새빨간 피로 그렸던 원형의 문양은 희미한 자국만 남긴 채 지워져 있었다.
“흑, 흑…….”
한쪽 구석에는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마물을 들고 내내 사제들과 대치하던 바이젤이었다.
가시나무처럼 앙상하게 마른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흑, 흑……. 흑…….”
그는 경련하듯 몸을 떨며 연신 훌쩍거렸다. 단검으로 그었던 손바닥은 누군가 옷자락을 찢어 감아준 모양이었다.
허리까지 차 있던 연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라비엘리는 드디어 루시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누워 있는 침대로 조심스레 걸어가자 바이젤의 울음소리가 처음보다 진해졌다.
“흑…… 흐윽.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그러더니 웅크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는 완전히 바닥에 엎드렸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그사이 옆에 서 있던 사제들이 바이젤을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손길을 거부하였다.
당혹스러웠으나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루시안의 안녕이 더욱 중요했으니까.
침대로 고개를 돌린 라비엘리가 조심스레 루시안에게로 향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무척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루시안.”
그가 평범한 잠에 빠져든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라비엘리는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제 부름에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그 오묘한 적갈색 눈동자로 저를 바라볼 것만 같은데.
루시안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다 끝났대요, 루시안.”
라비엘리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건드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가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라비엘리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손끝이 떨리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의사를 불러와야 한대요.”
조금 전 클라인이 남긴 말을 그대로 전하고는, 기가 막힌 듯 얕게 웃고 말았다.
“이제…… 내가 의사인데 누굴 부르냐며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만 한 의사는 없다며 자신만만하게 웃어야 하잖아요.”
입술을 붙였다가 떼고, 또 자긋자긋 깨물기를 반복해도 루시안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왜…….”
라비엘리가 루시안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먹이는 사이, 그녀 등 뒤에 서 있던 사제가 다가왔다.
“부인.”
“…….”
“신관님께서 최선을 다하셨으니 곧 일어나실 겁니다.”
라비엘리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내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그의 말이 그저 위로 차원에서 건넨 말이라는 걸 알았다.
“너무 염려 마세요.”
“네.”
사제들은 투박한 미소를 한 번 보이더니 바이젤이 엎드려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십시오.”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바이젤은 사제를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빌고 있었다.
“제게 사죄한다고 해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라비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이젤의 울음과 애원을 듣는 것이 몹시 괴롭게 느껴진 탓이다.
“사악한 힘을 빌려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흑, 흑…….”
사내는 그저 잘못했다는 말만 끝없이 반복할 뿐, 변명도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라비엘리는 그가 루시안과 대치했을 때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정확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안다.
‘그녀가 죽을 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아무것도……! 그 자식에게 똑같은 고통을 줄 수만 있다면 내 목숨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아.’
‘에몬 질, 너에게 오직 이오케레스와의 계약으로 끝낼 수 있는 악몽을 내리니.’
“잠깐만요, 사제님.”
라비엘리는 잠시 루시안을 내려다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분과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