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램프의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두운 방 안, 로제는 모깃소리로 중얼거리며 문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수없이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로제의 낯빛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다.
“괜찮아…….”
로제는 손바닥에서 계속 땀이 배어 나오는 통에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모아 비비고 다시 이마를 쓸어내리고 가슴을 두드린다. 로제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라비엘리는 차분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
“…….”
라비엘리는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로제만큼 초조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살빛에 핏기가 돌지 않아서인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괜찮을 거예요. 그렇지요, 부인?”
문가를 왔다 갔다 하던 로제가 우뚝 멈춰 서더니 라비엘리에게 말을 붙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는 진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
라비엘리는 말할 수 없고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표정 없는 얼굴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인.”
로제는 촉촉해진 눈으로 라비엘리에게 다가와 몸을 낮추었다.
“부군께서는 괜찮으실 거예요.”
조금 전, 루시안이 쓰러지자 사제들은 황급히 라비엘리를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그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아, 안 돼.”
속절없이 뒤로 물러난 라비엘리가 닫힌 문을 마구 두드렸으나 끝내 열리지 않았다.
“루시안!”
“물러서요!”
“옷소매로 코를 막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세요, 어서!”
그녀가 문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 닫힌 문 너머에서 음산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묘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단검에 봉인되어 있던 악마의 음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아, 안 돼…… 안 돼.”
라비엘리는 닫힌 문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다급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애처로운 호흡만 닿았다 떨어질 뿐이었다.
“괜찮은 거죠, 그렇죠? 괜찮다고 한마디만, 딱 한마디만…….”
“부인!”
그녀 등 뒤에 서 있던 로제가 라비엘리를 끌어안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안에서는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일인데.
아니, 정확히는 루시안의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르는데.
라비엘리는 무력하게 문밖에 서서 덜덜 떠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루시안!”
“부인, 가까이 가시면 안 돼요! 어서 이쪽으로!”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뒤에야 로제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내려왔다.
그 이후로는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누구든 내려와 어떤 말이든 해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너무 염려 마세요. 부군께서는 괜찮으실 거예요. 사제님들께서 악마를 다시 봉인하든 쫓아내든 하실 테니까요.”
“…….”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긴 하지만 전부 괜찮을 거예요. 부군께도 별일 없을 테고요.”
로제는 라비엘리를 위해 괜찮을 거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지금의 상황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걸 알았다.
로제가 제 불안을 숨기려는 듯 라비엘리의 손을 꼭 붙들었을 때였다.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던 라비엘리가 돌연 알 수 없는 말을 떨어뜨렸다.
“아니에요.”
“……네?”
“부군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로제는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표정을 바로 했다.
가엾게도 많이 놀랐구나.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생각해 보니 사냥이나 하며 여유를 즐기러 온 사람들인데,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질 않나 고달픈 일의 연속이었다.
궂은일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을 여인이 아닌가.
낙마 사고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늘 곁에서 그녀를 지키던 이가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행여 그의 피를 빌려 악마가 부활이라도 했다면.
그리하여 그의 영혼이 끔찍한 저주를 받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라비엘리가 몹시 안쓰럽게 느껴진 로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힘을 주었다.
“부인, 상심이 크시죠. 하지만 너무 염려 마세요.”
그러나 라비엘리는 다시 메마른 음성을 냈다.
“이아신스 부인이 아니에요.”
“부인.”
“아뇨, 로제. 저는 부인이 아녜요.”
농담을 하는 것 같지도,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뜬금없는 말인 데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부인.”
“전 몰리 이아신스 부인이 아니에요. 미안해요, 로제.”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미안해요. 로제에게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어요.”
“?”
“저 사람과 나는 결혼한 사이가 아녜요. 자세한 사정은 전부 다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저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는 커다란 눈만 두어 번 끔뻑거렸다.
지금껏 부인이라 불러왔는데 그렇게 부를 수도, 몰리 이아신스가 아니라니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말문이 탁 막혀 그저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미안해요.”
“아, 아뇨. 제게 미안할 일은…….”
로제는 말을 더하려다 말고 입술을 붙였다.
마음이 복잡하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라비엘리의 손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조금 전 벌어진 일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일까,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라비엘리는 뜻 모를 말을 뱉은 사람치고는 담담한 얼굴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나는 사실 루시안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실 그가 못 견디게 불편하고 끔찍해요.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내인 척 행동하고 있었어요. 내겐 다른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불편하고 끔찍하다니요.”
뜻밖의 말에 로제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상한 말이긴 했으나 단순히 충격이 극심해서 나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내게 여력이 있다면 달아나고 싶었어요. 어디든 좋으니 아주 먼 곳으로……. 주머니 속에 든 것이 조금 더 많았다면 그랬겠지요. 그랬다면 나는 아마 주저하지 않았을 거예요.”
“부인.”
“그런데 돈도, 용기도 없었어요. 나는 달아나지 못했고 그가 지독하게 느껴지면서도 곁에 있었어요.”
라비엘리는 어금니에 바짝 힘을 주었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한다면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은 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매몰될 것만 같아서였다.
“내가 만약 달아났다면, 알레를 타고 세상 끝까지 도망쳤다면 지금 그 사람은 여기 없었을까요?”
“부인.”
“그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오, 세상에. 그런 말씀 마세요. 이건 부인 탓이 아니에요.”
로제는 라비엘리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제 온기라도 나눠주지 않으면 그대로 말라 부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부인, 이건 순전히 마물을 가져온 사람의 잘못이에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악마와 거래를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요. 부군, 아니 신사분께서 다치신 건 사고였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 조금 더 정확히는 부군께서 용기 있게 행동하신 거예요. 만약 그대로 검을 찔렀다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지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로제, 악마에게 육신을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요?”
라비엘리의 질문에 로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고는 눈을 허공으로 돌리며 태연히 대답했다.
“아뇨, 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사제님들이 네 분, 아니 다섯 분이나 계시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용기 있게 행동한 부군을 지켜주실 거예요…….”
로제는 가만히 라비엘리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로제에게 몸을 맡긴 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숨을 몰아쉬었다.
‘가엾게도.’
이토록 불안하고 힘들어하면서 왜 그렇게 말했을까.
지독하고 끔찍한 사람을 이렇게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쪽이 그녀의 진심일까.
로제가 제 온기 속에 의문을 녹여내고 있을 때였다.
땡, 땡땡.
멀리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 로제가 몸을 세우자 이윽고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그녀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 에몬 씨가 보낸 사람이 온 모양이에요. 하필 이럴 때. 이를 어쩌지?”
로제가 발을 동동 구르는 와중에도 종소리는 연신 울려댔다.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니지, 차라리 잘됐어요. 여관에서 무슨 일이 있어 났는지는 사장님도 아셔야 하니까. 저는 우선 1층으로 내려갈게요. 여기 혼자 계실 수 있으시지요?”
라비엘리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그러고는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채 라비엘리에게 물었다.
“같이 내려갈까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여기 계시는 게 낫겠어요.”
“네.”
“금방 다시 올게요.”
“로제, 조심해요.”
“염려 마세요. 위층이 조용한 걸 보니 이미 상황은 종료된 것 같아요.”
로제는 조금 더 빨라진 종소리에 급히 문을 밀더니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