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3층에 올라온 직후 사내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클라인은 상황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는 위험한 마물을 들고 있긴 했지만, 악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간교한 꼬임에 빠져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차분히 설명한다면 말이 통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치는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었고 사내는 마음을 바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으로 제압할 수도 없는 상황. 지팡이로 단검을 쳐내는 수도 있겠지만, 계속 몸을 움직이며 휘두르는 통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너무 위험한 물건입니다.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으세요.”
“안 돼……, 안 됩니다……!”
이러다 그가 단검으로 제 몸을 찌르기라도 한다면, 악마가 그의 몸을 빌려 부활할 것이다.
이미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은 악마는 튀어나올 기회만 노리고 있을 터.
단검은 지독한 썩은 내를 풍기고 있었다.
‘이건 분명 이오케레스의 물건이야.’
이대로 가다간 사내가 육신을 잃는 것은 물론, 이 일대에 역병이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는 지체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클라인이 사제들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클라인이 시선을 붙드는 동안 나머지 셋이 힘으로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사제들 뒤에 서 있던 루시안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이름이 뭡니까.”
클라인이 힐끗 뒤를 돌아보자 루시안은 초연한 얼굴로 한 번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바이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전 루시안입니다. 로튼에서 왔어요.”
“…….”
“당신은?”
루시안은 차분한 음성으로 바이젤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예민한 눈으로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복도에 서 있던 로제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소리쳤다.
“저, 저 사람…… 바이젤. 바이젤 루오예요.”
에몬과의 대화를 더듬어 기억해낸 이름, 로제의 외침에 바이젤의 눈매가 처음보다 날카롭게 변하였다.
바이젤이 떨고 있는 사이, 루시안은 그가 들고 있던 단검을 유심히 보았다.
“저자가 든 것이 정말 마물입니까?”
루시안의 질문에 클라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자는 누구지?’
다만 상황이 급박했으므로 여관 관리인 정도라 생각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맞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악마가 완전히 부활할 거예요. 그 전에 검을 다시 봉인해야 합니다.”
루시안은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형편없는 차림새와 얼굴.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흉흉한 눈매와 낯빛이 위험이나 죽음 따위로는 사내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여관 주인과의 악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아닐까.
이 나약하고 가여운 사내를 들쑤신 건 대체 누구인가.
“바이젤. 당신이 그 단검으로 무얼 하려는 지 알아요.”
“다, 당신이 뭘 안다고. 당신이 대체 뭘……!”
“이곳 주인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거 알아요. 지금 당신이 무척 괴롭다는 것도.”
“…….”
“하지만 그 단검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요. 오히려 당신의 몸을 빌려 악마가 부활할 겁니다. 그럼 가여운 당신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해요.”
“아니, 나는 해결하려는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냐……!”
바이젤은 마룻바닥에 그려 넣은 원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사내가 일러준 대로 사흘 밤낮을 굶은 뒤 텅 빈 육체를 준비했다. 그런 다음 손바닥을 칼로 그어 피를 냈다.
두어 방울의 피와 사내가 준 새빨간 액체를 섞었다. 그러자 매캐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더니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이걸 그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커다란 원은 복수를 도와줄 이를 부르는 것이고, 안에 들어있는 육각형은 당신을 지킬 겁니다.’
‘……부른다고? 설마 이오케레스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그저 질병을 퍼트리는 하급 악마가 심부름하는 것뿐입니다.’
‘그럼 에몬에게 저주를 건 뒤에 악마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알 수 없죠. 자연스레 소멸될 수도, 혹은 지상에 뿌리를 내릴 수도.’
‘…….’
‘어차피 상관없지 않아요? 당신은 그저 복수만 하면 되는 건데.’
‘……난 에몬에게만 복수하면 되지 괜히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저런 가여운 사람 같으니. 잘 생각해 봐요. 당신의 아내가 죽을 때 도와준 자들이 있었나요? 아들이 끌려갈 때는 또 어땠고요. 울부짖으며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달라고 했을 때, 나선 사람이 있었나요?’
‘…….’
‘아무도 돕지 않았어. 아무도. 당신을 제외한 모두가 다 한패라고.’
‘……아냐.’
‘돕기는커녕 속으로 당신네가 귀찮다며 욕하고 저주했을 거야.’
‘아냐, 그렇지 않아.’
‘맞아요, 그랬어.’
‘…….’
‘그러니 한심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어서 이걸 받아요.’
기묘한 빛이 어른거렸으나 지금 단검으로 누구든 찌르지 않으면 기운을 잃고 말 것이다.
‘안 돼. 이대로 기회를 놓친다면.’
바이젤은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었다.
칼로 상처를 낸 손바닥은 욱신거렸고 오랫동안 먹지 못해 몸에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이러고 있다가는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다. 저를 에워싼 사제들이 달려들어 단검을 빼앗기라도 한다면.
복수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바이젤, 내게 무슨 일인지 차분히 얘기해 줘요.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하는지 알 수 없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그러니 그 마물은 바닥에 내려놓아요.”
“……돕는다고?”
바이젤이 비틀린 음성으로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웃기지 마……, 돕는다고? 내가 원하는 건 내 아내가 살아 돌아오는 일이야. 당신들이 그걸 해줄 수 있나?”
루시안은 차분함을 잃지 않으며 고개를 한 번 숙였다 들었다.
“바이젤, 부인의 일을 유감입니다. 힘든 일을 겪었군요.”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지만 바이젤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죽을 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아무것도……! 그 자식에게 똑같은 고통을 줄 수만 있다면 내 목숨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아.”
“설마 악마의 말을 믿어요? 정말 그렇게 될 거로 생각합니까?”
“……의사 양반, 애석하지만 지금 믿을 건 그것뿐이야.”
“바이젤.”
“에몬 질, 너에게 오직 이오케레스와의 계약으로 끝낼 수 있는 악몽을 내리니.”
그 말을 끝으로 바이젤이 단검을 높이 쳐든 순간이었다.
“안 돼!”
급히 몸을 던져 바이젤을 막아선 건 다름 아닌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이 그를 밀쳐내자 바이젤은 마치 낙엽처럼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악!”
그를 밀어낸 동시에 루시안은 재빨리 단검을 빼앗으려 했다.
“안 돼, 안 돼!”
바이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윽고 달려든 사제들에 의해 양손과 다리마저 붙들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헉, 헉…….”
쨍그랑.
바닥에 단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가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라비엘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악마를 소환하고 저주를 거는 건 책 속에서나 본 일이었는데.
실제로 일어날뻔했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역병이라니.
라비엘리는 역병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한 번 그것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면 처참하고 잔혹한 흔적만이 남게 된다.
‘큰일 날 뻔했어.’
그런 생각을 접어내며 사내들이 엉겨 붙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하나둘 일어서는 사제들과는 달리 루시안은 클라인과 함께 마지막까지 바닥에 쓰러진 바이젤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루시안.”
갑자기 사제들이 들이닥쳐 얼마나 당황했는지, 지금은 괜찮은 것인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제 바닥에 그려진 저 흉물스러운 것을 지우고 단검을 제대로 봉인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루시안에게 가까이 다가간 라비엘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시안.”
그는 라비엘리의 부름에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씨, 물러서세요.”
라비엘리를 막아선 건 어두운 낯빛을 한 사제였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이제 괜찮은 거죠?”
불안을 애써 누른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사제가 말없이 고개를 저은 순간이었다.
그저 바이젤을 붙잡고 있는 줄 알았던 루시안이 슬쩍 고개만 돌리더니 라비엘리와 눈을 마주쳤다.
“루시안.”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고,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 말하려고 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어딘가 다급한 음성에 라비엘리가 걸음을 뚝 멈추자 루시안이 다시 차분히 그녀에게 말했다.
“거기 있어요. 그리고…….”
“…….”
“너무 놀라지 마요, 레이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루시안의 왼쪽 팔뚝에서 시작된 붉은 자국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라비엘리는 그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