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바이젤 루오는 약 7일 전 엘던에 왔다.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가장 꼭대기 방으로. 숙박비는 선급으로 미리 내겠소.”
“네, 얼마나 묵으시나요?”
“일주일.”
“여기 서명해주시고요. 식사와 세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바이젤은 말없이 주머니 속에 있는 크랜을 전부 털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식사니 세탁이니 하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을 처분해 받은 크랜은 바이젤의 낡은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이 다였다.
고작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양.
그것이 바이젤 루오의 전부였다.
이까짓 것이 무어라고.
이깟 돈이 다 무어라고.
하녀에게서 열쇠를 건네받은 바이젤은 천천히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직후 그는 낡은 가방 안에서 반으로 접힌 쪽지와 단검, 작은 병 두 개를 꺼내 탁자에 늘어놓았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맥없이 살피던 바이젤은 길고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할 수 없을 것 같다.
할 수 없어…….
바이젤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공허한 눈으로 접힌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 그려진 건 원과 겹쳐진 기묘한 무늬의 도형.
생소한 무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이젤은 그것을 던지듯 탁자 위에 팽개쳤다.
“이런다고 될까. 아니, 내가 할 수 있을까.”
연거푸 한숨을 내쉬지만 바이젤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무기력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바이젤 루오는 몇 시간 전, 낡은 제 오두막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했다.
집 안을 전부 헤집어 찾은 굵은 밧줄로 목을 매고 더는 세상에 없는 아내의 곁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흑, 흐흑……. 흑…….”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평화로운 삶이었다. 그의 아내는 병약했지만 부지런했고, 하나뿐인 아들은 밝고 사랑스러웠다.
“여보…… 알릭스…….”
그들과 나누었던 온기는 여전히 집 안 곳곳에 남아 있는데 더는 볼 수도 안을 수도 없었다.
시작은 작은 불행이었다.
그저 질병이 문을 두드리고 병약한 아내를 건드렸을 뿐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내를 살리려던 것뿐이었다.
가난한 자들은 아프면 그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녀를 살리려 에몬에게 돈을 빌리지만 않았어도.
아들은 지킬 수 있었을지 몰랐다.
아들이 끌려가며 울부짖던 소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았다.
마치 귓전에 눅진하게 들러붙어 그가 숨을 쉬는 동안에는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살고 싶지 않았다.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아니, 살아갈 수 없었다.
차라리 죽어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죽어 없어질 것이라고 되뇌었다.
“여보…… 미안하다, 알릭스.”
바이젤은 두 다리로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의자를 오른발로 탁 쳤다.
그의 발이 허공에 뜨고 밧줄이 가여운 숨을 비튼 순간이었다.
“어?”
갑자기 닫힌 문이 발칵 열리더니 바깥 공기가 훅 밀려 들어왔다.
곧이어 안으로 한 걸음 내디딘 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였다.
“어어? 아니 뭐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바이젤을 보고 놀라 소리를 쳤다.
“아니, 이봐요!”
“컥, 컥…….”
사내는 품 안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더니 천장으로 힘껏 던졌다.
단검은 정확히 바이젤의 목을 매달고 있는 밧줄에 명중했고 그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쿨럭, 쿨럭!”
“이봐요, 괜찮아요?”
땅으로 추락한 바이젤은 한동안 목을 움켜쥐고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그사이 검은 로브를 쓴 사내는 제가 던진 단검을 주워 도로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바이젤이 울음과 기침이 뒤섞인 토로를 끝낼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주었다.
“다, 당신 뭐야…….”
당장 죽어 없어지려 했는데, 그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다니.
목구멍 안에 남은 이물감을 누르며 바이젤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뭔데 남의 집에 들어와서……!”
한참 만에 진정한 바이젤이 울먹이자 사내는 천천히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남의 집이라니요.”
“……?”
사내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로브를 벗자 드러난 얼굴은 갓 성년이 된 듯 순진하고 몹시 어려 보였다.
새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검은 흑발-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었다.
“이 집, 얼마 전 팔지 않았습니까?”
바이젤은 그제야 눈앞에 선 사내가 이 낡아빠진 오두막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럼, 거기서 기다리든 나중에 다시 오든 하쇼. 나는 이 집에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바이젤이 맥없이 중얼거리며 끊어진 밧줄을 쥐자 사내가 그를 저지했다.
“워, 워. 이러지 마요. 새로운 작업실에서 송장 처리하긴 싫으니까.”
“아직은 내 집입니다. 이걸 넘기기로 한 건 내일 오후라고요.”
“알아요, 알아. 일단 그 무서운 것 좀 내려놔 봐요.”
사내는 넉살 좋은 목소리로 바이젤을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이젤은 순순히 손에 밧줄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기력하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망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눈을 가진 사내는 바이젤 옆에 털썩 앉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젠장, 제기랄.”
“하, 어떻게 수리하면 좋을지 미리 와보길 잘했군. 안 그랬으면 못 볼 꼴을 볼 뻔했으니.”
그러고는 슬쩍 바이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봐요, 아무리 그래도.”
“…….”
“죽으면 끝인데, 죽을 생각으로 살아야지.”
사내의 말에 바이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 순간, 사내가 바이젤의 팔을 붙잡으며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당신,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
“이런 얘기 미안하지만…… 대충 알고 있어요.”
사내의 말에도 바이젤은 아무런 말도, 심지어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넋이 빠져나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모른다는 게 정확했다.
“분하지도 않아요? 이대로 죽으면……!”
“그래서? 분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니 숨이 끊어질 만큼 고통스럽다고 해서 내가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봐요.”
“함부로 말하지 마…….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야. 그게 이거라고!”
바이젤은 손에 쥔 밧줄을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
“할 수 있는 게 죽는 거라서……! 죽으면 그만이니까!”
“지금 그 마음으로 복수를 해요.”
“……뭐요?”
“복수. 당신을 죽고 싶을 만큼 괴롭게 만든 자는, 당신이 죽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잘 먹고 잘 자고 잘살겠지.”
사내는 입술을 부드럽게 양옆으로 늘이며 속삭였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
“억울하지도 않아요? 분하지도 않아?”
“…….”
“나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 복수할 겁니다.”
“…….”
“절대 편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사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온화해 보이던 그의 눈에 어딘가 기묘한 안광이 흘렀으나 바이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말은 쉽지. 복수가 쉬운 줄 압니까? 그것도 가진 자들이나 할 수 있는 거지. 몸뚱이만 남은 내가 대체 무슨 수로 그를 상대하지……?”
“그거요, 바로 그거예요!”
바이젤이 그를 쳐다보자 사내는 눈을 교묘히 접으며 웃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 밧줄을 끊을 때 썼던 단검을 슬그머니 꺼내 내밀었다.
“…….”
“이걸로 직접 찔러도 좋고, 아니면 그와 숨결을 나눈 사람을 찔러요.”
“뭐라고요?”
“아, 쉽게 말해 그와 가까운 사람을 찌르라고요.”
“…….”
“그럼 그는 평생을 온몸에 수포가 올라왔다 터지길 반복하는 병에 시달릴 것입니다.”
사내는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내뱉었다.
“그건 단순한 수포가 아니라 지상에 있는 약재로는 절대 치료할 수 없지. 그걸 낫게 하는 건 오직 지옥 불에 던져지는 일뿐. 지옥에서 가져온 불로 피부를 지져야만 해요. 그는 결국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저를 지옥으로 데려가 줄 악마에게 육신과 영혼을 팔게 될 겁니다.”
“…….”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통받는 거야. 어때요, 이 정도는 해야 복수지요.”
바이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헛소리를 길게도 늘어놓는군.”
“이건 단순한 검이 아녜요. 이오케레스의 저주가 걸린 마물이거든요.”
사내는 단검을 들고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를 찌르기도 전에 내가 죽을 겁니다. 가까이 가기도 전에…….”
바이젤이 피로한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사내가 갑자기 바이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킁킁거렸다.
“지, 지금 뭐 하는……!”
“당신에게도 그의 숨결이 느껴져. 그러니 정 안 되면 당신이라도 찔러요.”
“뭐라고?”
“그가 머물렀던 곳에 이걸 그려요. 그러면 어둠이 당신을 피해 복수의 대상을 찾아갈 겁니다.”
사내는 부드럽게 웃으며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과 종이를 하나 건넸다.
유리병 안에는 새빨간 액체가, 종이에는 기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
그렇게 바이젤 루오는 약 7일 전 엘던에 왔다.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에몬에게 저주를 걸어 그에게 죽음보다 강력한 고통을 주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