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3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로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재잘거렸던 걸 생각하면 무척 낯선 모습임은 분명했다.
삭막한 공기를 채운 건 오래된 나무가 갈라지며 내는 파열음과 혹시 몰라 챙겨온 비상용 열쇠 꾸러미가 쩔렁대는 소리뿐이었다.
301호 앞에 멈춘 로제는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루시안을 한 번 돌아본 뒤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루시안이 앞으로 나서며 그녀에게 뒤에 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별말 없이 슬쩍 뒤로 물러서는 동안에도, 안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떡하죠?”
로제는 불안했다. 루시안이 있어 다행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어쩐지 끔찍한 장면을 마주하게 될까 봐, 이 와중에도 엘던에 큰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웠다.
루시안은 문가에 귀를 대보았다가 다시 몸을 세우며 로제에게 물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건 맞습니까?”
로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제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없을 때 여관을 나갔을 수도 있겠지요. 그랬다면 열쇠는 두고 갔을 텐데. 물론 급하게 나가느라 들고 갔을 수도 있…….”
루시안은 로제의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적당히 잘랐다.
“이 방 열쇠 있습니까?”
“잠시만요.”
로제는 꾸러미를 뒤적이며 301호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라비엘리는 1층에 남아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누군가 장난을 친 걸 수도 있어.’
여러 사람이 오가며 묵는 여관이 아닌가.
함께 지내던 이들이 다투다 소리를 낸 것일 수도, 혹은 조금 전 생각한 것처럼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며 태연히 있고 싶었지만, 라비엘리는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했다.
카운터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안을 억누른다.
꽤 오래 걸은 데다 쉬지 못했기 때문인지 발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신경이 위층으로 향한 탓에 통증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라비엘리는 제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지금껏 불안을 함께 공유했던 자들의 부재, 별일 아닐 거로 생각하면서도 조금 전 사내의 비명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닐 거야. 괜찮겠지.’
그런 생각 끝에 두 손을 모았을 때였다.
멀리서 말이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엘리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저 창가를 빤히 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은 길고 우아한 사제복 차림의 사내들이었다.
라비엘리는 한눈에 그들이 신전이나 사원에서 온 자들이라는 걸 알았다.
사냥터 인근에 사제들이 왔다는 건 어딘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
그 순간, 라비엘리를 마주한 클라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신의 광휘를 닮은 듯한 아름다운 백금발 머리카락, 감정이 전부 비쳐 보일 만큼 얇고 투명한 피부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어느 것 하나 레브리안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레브리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닮았어.’
물론 외형이 비슷한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여인은 희귀한 머리카락 색뿐만 아니라 눈빛, 분위기마저 흡사했다.
‘말도 안 돼.’
클라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옆에 서 있던 수습 신관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저, 신관님.”
그제야 클라인은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한 번 넘겼다. 그런 다음 무수하게 떠오른 잡념을 몰아내며 입을 열었다.
“저는 클라인 이온, 루미온 님을 모시는 신관입니다.”
라비엘리는 제가 이들을 응대해도 좋을지 아닐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녀는 엘던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사람인 데다 위층에는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녀의 대답에 클라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여기 주인은 어디에 계십니까?”
“주인분은 저도 잘 모르지만, 관리하는 분은 위에 계세요. 기다리시면 제가…….”
그때, 클라인은 여러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사제들과 눈을 맞추었다.
모두가 확실히 느끼고 있는 그것,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여관에…….”
클라인의 시선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너머로 향했을 때였다.
그가 하려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퍼졌다.
“꺄아악!”
“이런.”
클라인은 망설임 없이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사제들도 달려갔고, 라비엘리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로제?”
비명을 지른 건 분명 로제다.
저 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위층에서 일어난 일과 사제들이 온 것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로제의 비명에 곧장 뛰쳐 올라간 것을 보면 분명히 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의 물기가 완전히 말라버리는 것만 같았다.
두렵고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제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홀로 남은 그녀의 심장만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정신없이 올라온 직후, 라비엘리는 301호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 로제가 덩그러니 복도에 서서 두 손을 입에 모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로제.”
이윽고 발끝에서 시작된 삐걱대는 소리를 짓누르며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로제는 라비엘리를 발견한 뒤에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를 문 앞에 박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라비엘리는 로제가 아무렇지도 않아서가 아니라 극한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라비엘리는 차마 로제를 다시 부르지도 못하고 그녀처럼 몸을 잔뜩 움츠렸다.
열린 문 안에서는 몹시 격한 사내의 숨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사방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대체 무슨 일이지?’
안에서 쏟아지는 사내들의 음성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정신을 집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공포에 잠식된 라비엘리의 귀는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루시안은 괜찮은 걸까?’
호기롭게 올라간 그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난, 나는…… 이곳과는 무관한 사람이야.’
두려움 탓에 이기적인 생각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를 지킬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보잘것없는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언제부터 제 목숨에 연민을 가진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우선은 피하고 싶었다.
이대로 로제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얗게 질린 손을 앞으로 내밀었을 때였다.
“잠깐만,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말해봐요.”
열린 문틈 사이로 절박한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라비엘리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세운 건 루시안의 목소리였다.
사내들의 거친 호흡에 밀려 라비엘리의 발끝에 떨어진 다급한 음성.
순간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벌어진 문틈에 손을 밀어 넣고 발칵 열어젖혔다.
“……!”
방 안은 라비엘리가 묵고 있는 곳보다는 좁았다.
중간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천으로 가려놓은 탓에 사방은 어두웠다.
컴컴한 방 한복판,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사내가 단검을 쥔 채 바들바들 떨며 서 있었다.
“그 검 내려놓으세요.”
클라인은 엄숙한 음성으로 사내에게 말했다.
하지만 사내는 비 오듯 땀을 흘릴 뿐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싫어, 안 돼.”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저리 가세요, 제발. 제발……! 더 가까이 오면! 그때는 나도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
사내는 단검을 앞으로 내저으며 저와 대치 중인 자들을 위협했다.
물론 그의 행색을 보면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라비엘리의 시선이 사내를 지나 그가 서 있는 마룻바닥으로 향했다.
바닥에는 새빨간 피로 그려낸 원형의 문양이 섬뜩한 빛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