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단순한 비명이 아니었다.
얼핏 슬픔과 좌절, 분노가 뒤엉킨 끔찍한 소리였다.
갑작스러운 고성에 놀란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소리에서 파생된 우울이 그녀의 가슴을 마구 뛰게 했다.
‘뭐지?’
물론 당황한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 울먹이던 로제도 눈물을 뚝 멈추고 젖은 눈동자만 굴렸다.
“……무슨 소리죠?”
“누가 비명을 지른 것 같은데.”
그사이 라비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이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명은 끔찍한 여운만 남긴 채 끝났고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스산한 공백에 세 사람 역시 잠시 말이 없었다.
짧았던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루시안이었다.
“심상치 않게 들리는데. 올라가 봐야겠군요.”
사실 루시안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라비엘리의 발목은 거의 다 회복되었고 후작 역시 돌아올 즈음이라 판단해, 내일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제가 갑자기 엘던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부터 뭔가 꼬여버린 것 같았다.
라비엘리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저 가엾은 하녀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 눈치였다.
원한다면 후작의 저택에서 일하게 해줄 수도 있겠지만, 무려 엘던에서 일하던 하녀가 아닌가.
에몬이 그녀와 마주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물론 에몬이 해고했으니 로제가 테아노의 저택에서 일하는 게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로제에게 지금까지 한 거짓말을 전부 털어놓아야만 했다.
로제가 후작가에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지낼 수 있을 것인가.
진실을 털어놓아도 괜찮을 만큼 믿을만한 여인인가.
‘차라리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 주는 게 나을지도.’
그런 생각 끝에, 루시안은 지금도 침대 위에 누워 죽어가고 있을 친구를 떠올렸다.
니엘에게 말한다면 로제가 일할 저택을 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차마 니엘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니엘이 기다리는 소식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닐 테니까.
“아뇨, 아직은 제가 엘던을 책임지고 있으니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올게요.”
로제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더니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고는 장부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라비엘리가 로제를 만류하며 인상을 썼다.
“로제, 어떻게 확인을 하려고요. 그러지 말고 그냥.”
라비엘리는 로제에게 확인하지 말고 그냥 떠나라고 말할 뻔하였다.
에몬이 그녀를 내쫓은 판에 더는 엘던에서 벌어지는 일을 책임질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당장 갈 곳 없는 여인에게 그리 말하는 것도, 위에 올라가 무슨 일인지 확인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라비엘리의 속내를 알지 못한 로제는 이미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사람은 없는지 누가 고성을 지른 건지 물어봐야죠. 만약 또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면 곤란하니까요.”
그 순간, 라비엘리의 머릿속에 로제가 찾아와 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런데 한 번도 보이지 않고, 문 앞에 식사를 두어도 손도 대지 않더라고요. 영 찜찜해서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요. 뭔가 꺼림칙해요.’
‘위에서 목을 매달았거나 손목을 그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외곽에 있는 여관에 와서 살인을 저지르거나 죽는 일이 왕왕 있다고 들었어요. 둘이 들어와서 한 명만 나간다거나 아예 나가지 않는다거나.’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렸다.
“로제.”
“네, 부인.”
“어제 말한 3층 투숙객 말이에요. 혹시 오늘은 어땠어요?”
라비엘리가 묻자 로제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그녀 역시 수상한 사내의 행적이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모, 모르겠어요. 오늘은 식사를 챙기지 않았거든요. 아침 일찍 사장님이 오셨고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네.”
로제는 에몬의 반응을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자살은커녕 날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사장님께서 아는 분이더라고요.”
“뭐라고요? 세상에. 아는 분이라면 더 올라가 봐야 하지 않았을까요?”
의미 없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공연히 언짢은 마음에 라비엘리가 되물었다.
로제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지만 고용인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에몬의 반응으로 보아 중요한 인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고.
“어쨌든 제가 한 번 가볼게요. 부인, 2층으로 올라가 계세요.”
그때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루시안이 처음으로 나섰다.
“같이 가죠.”
“네?”
로제는 저도 모르게 라비엘리의 눈치를 한 번 보았다.
루시안이 함께 가준다면 무척 든든할 것이다.
“저도 같이 가요.”
“아니에요, 부인. 별일 아닐 테니 2층에 올라가 계세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는 그제야 크게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뇨, 올라가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요.”
루시안이 라비엘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렇지 못한 음성으로 말했다.
라비엘리가 왜인지 물으려는데 로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손님이 오실지 모르니까요?”
루시안은 그녀의 순진한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하였다.
“아무튼 올라가 보죠.”
* * *
오스트린에서 출발한 클라인과 사제들은 목요일 오후, 로튼 외곽에 도착했다.
로튼의 영지라고는 하나 워낙 경계선에 있었고 갈라테이아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마을이기도 했다.
클라인은 수습 신관 한 명과 수련 사제 두 명을 데리고 왔다. 대신관 하비네스는 잡일을 도맡고 심부름을 할 아이를 하나 데려가길 권했으나 클라인은 거절했다.
마음 같아서는 레브리안을 데리고 가고 싶었다. 에몬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직후인지라 그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여정에 개인적인 욕심으로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클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에몬 역시 제가 부탁한 약재를 준비하러 오스트린을 떠난 상황이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멀리 보이는 여관에 짐을 풀기로 한 사제들이 속도를 내고 있을 때였다.
이상한 기운을 가장 먼저 감지한 건 클라인이었다.
‘저건 분명…….’
선두에서 달리고 있던 클라인이 한 손을 들며 천천히 속도를 낮추었다.
그 사이 바로 뒤에서 달려오고 있던 수습 신관 하나가 고삐를 당기며 곁으로 다가왔다.
“신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클라인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건물, 얼핏 먹구름처럼 보이는 어둠 속에서 안개처럼 서서히 피어나는 것은 분명 불길한 기운이었다.
“대신관님의 말처럼 루미온의 날에 맞춰 출몰하려는 모양입니다.”
수습 신관은 클라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 보이는 먹구름은 조금씩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그리 강력한 녀석처럼 보이진 않네요.”
클라인은 그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못했다.
분명 강력한 힘은 아니었으나 고통과 권태, 연민과 슬픔이 짙게 느껴진 탓이었다.
“여관이라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일 텐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클라인이 다시 고삐를 세게 움켜쥐었다.
“서두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