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로제는 훌쩍이며 가방에 옷가지를 쑤셔 넣고 있었다.
3년이나 엘던을 제집처럼 생각하며 지냈는데 막상 나가려니 가방에 넣을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다 낡아빠진 세모꼴 두건 몇 장과 구리로 만든 장식품이 달린 싸구려 목걸이, 머리글자를 새겨 넣은 손수건 한 장과 엉성한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 누더기 같은 속옷과 겨울용 모직 치마가 전부였다.
그 와중에 짚으로 엮은 슬리퍼와 슈미즈는 라비엘리에게 빌려준 상태.
제 흔적을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울적해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휴,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로제는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을 가방 위에 툭 떨어뜨렸다.
공장이든 대농장이든 어디든 가는 게 여기서 일하는 것보단 나을 거로 생각했다.
적어도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 끝에는 늘 엘던이 있었다.
에몬에게 사람을 더 채용해달라 요구한 건 엘던에 지금처럼 계속 있고 싶어서였다.
“사장님 말씀이 전부 옳지. 죽을 뻔한 사람 구해주셨는데 살만해졌다고 이러는 건……. 아아,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대체 왜 그런 객기를 부린 거지? 로제, 너 제정신이니?”
생각할수록 고개가 땅으로 고꾸라진다.
당장 나가라는 말만 남기고 에몬은 가버렸으니 이제 애원할 곳도 없었다.
“멍청한 것, 바보 같은 것!”
연신 훌쩍이던 로제는 주먹을 말아 쥐고 제 머리를 여러 번 때렸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정리해서 나가야 해.”
로제는 누구보다 에몬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마주하는 에몬이야말로 장사꾼으로 포장되지 않은 본성에 가까운 모습일 터다.
몇 시간 이내 에몬은 사람을 보내 로제를 쫓아낼 테고 지금쯤이면 이미 제 자리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가면 이제 엘던은 누가 관리하지?”
로제는 이 와중에도 엘던을 걱정하고 있는 제가 한심했다.
1층 카운터를 비워놓고 이대로 나가도 괜찮은 걸까.
에몬이 보낸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나가는 게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손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에휴, 나도 참. 알아서 하시겠지. 아마 바로 사람을 보내실 거야. 일할 사람 찾는 일이야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런 생각 끝에 로제가 손등으로 코를 문질러 닦았다.
애석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에몬은 제가 뱉은 말을 번복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미련 따위 갖지 말아야 했다.
요동치는 감정을 가다듬은 로제가 바닥에 남은 잡동사니를 주워 담기 시작했을 때였다.
멀리 말이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늘 손님을 확인하는 습관 탓에 로제가 무심코 목을 길게 빼 밖을 내다보았다.
순식간에 내달려 엘던 앞에 멈춘 건 다름 아닌 라비엘리와 루시안이었다.
“아아, 부인…….”
로제는 라비엘리를 본 순간, 가까스로 추슬렀던 감정이 다시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라비엘리는 지난 며칠간 로제의 좋은 말동무였다.
늘 일에 치여 정신없이 살던 그녀에게 새로운 바람과 웃음을 전해 준 인물이 아니던가.
“부인께 어서 말씀드려야지.”
로제는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는 밖으로 나갔다.
손으로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표정을 정돈한 뒤 문을 발칵 열자, 초록색 모자를 눌러 쓴 라비엘리가 보였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 라비엘리는 흠칫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물론 마주친 사람이 로제라는 걸 깨닫고 금방 표정을 풀었지만.
놀란 건 라비엘리뿐이 아니었다.
“부인, 머리가 왜…….”
“아.”
라비엘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던 주변을 살폈다.
낯선 마차는 보이지 않았으며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도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에몬 씨는 돌아간 건가?’
“오늘 바람이 제법 부는 데다 거추장스러워서요.”
라비엘리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제 모습에 가벼운 회의를 느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너무 잘 어울리세요. 만약 엘던 앞에서 마주친 게 아니라면 부인인 줄 몰라봤을 거예요. 그 멋진 모자는 또 어떻고요, 그나저나 어디에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로제는 애를 쓰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물론 라비엘리에게 제 감정을 전부 토로하고 싶은 충동이 밀물처럼 밀려들었지만 애써 눌렀다.
“로제, 어떤 색을 좋아해요?”
그때, 라비엘리가 들고있던 모자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색이요?”
“네, 골라봐요. 로제에겐 보다 화려한 쪽이 어울릴 것 같은데.”
“말도 안 돼. 정말 제게 주신다고요?”
“네, 선물이에요.”
로제는 라비엘리가 내민 모자를 차마 건네받지도 못한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것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라비엘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얼굴색이 좋지 않아요.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그러니까…….”
로제는 어떤 식으로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짐을 꾸리는 내내 라비엘리를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를 마주하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로제에게는 단순히 엘던을 떠나고 마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의 터전과 삶에 관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므로.
그사이 마구간에 말을 매어두고 온 루시안이 들어왔다.
아직 위로 올라가지 않고 1층에 있는 라비엘리에게 루시안이 말을 건네려던 찰나였다.
“부인!”
갑자기 로제가 라비엘리를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지만, 라비엘리는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조심스레 로제를 안아주었다.
“로제.”
라비엘리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천천히 등허리를 토닥였다.
한참을 품에 안겨 엉엉 울던 로제가 가까스로 진정하자 라비엘리는 제 소매 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괜찮아요? 따뜻한 물을 좀 줄까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는 면목 없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부인…….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뇨, 죄송하다니요.”
“죄송해요. 용서하세요.”
로제는 손등으로 엉망이 된 제 얼굴을 마구 닦아냈다.
“그런 말 말아요. 용서라니.”
늘 지친 얼굴이었으나 말이 많고 살가운 그녀에게 어느덧 정이 들어버렸다.
라비엘리는 로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줄래요?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울게요.”
“…….”
“내 선에서 해결이 안 되면.”
라비엘리는 지금까지도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루시안을 한 번 힐끔거렸다.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형편없는 얼굴로 입을 닫은 로제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게 설령 헛소리라 하더라도.
라비엘리는 등 뒤에 서 있는 루시안을 한 번 의식한 뒤 입을 열었다.
“그이에게 부탁할게요. 나름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거든요. 우리가 뭐든 도울 수 있을 거예요.”
“부인…….”
“그러니 어서 말해봐요.”
등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시안이 고개를 옆으로 살래살래 저었을 때였다.
“오전에 사장님께서 다녀가셨어요. 정말 오랜만에 오셨죠. 거의 몇 달 만에 오신 것 같아요.”
로제는 조금 전 제게 벌어진 일을 떠올리자 다시 울컥한 듯 입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부인께서는 아시잖아요. 제가 엘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를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지칠 대로 지쳤어요. 여기 온 지 3년이나 되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사장님께 불평해본 적 없어요. 물론 엘던에 오기 전에는 이보다 더 비참하게 살았지만요. 그래서 몸이 부서질 것 같아도 버티고 또 버텼어요.”
“로제.”
“여기가 집이고 일터고 제 전부에요. 저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엘던을 위해 일하고 싶었을 뿐인데…….”
“로제가 열심히 하는 거 표현은 안 해도 전부 알고 계실 거예요.”
“제가 또 부인 앞에서 주절거리고 있네요. 이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고 말았어요. 감사하고 또 죄송해요. 하지만 이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니 용서하세요.”
로제가 맥없이 마지막 말을 떨어뜨리자 라비엘리가 놀라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같이 일할 사람을 한 명 더 채용해달라고 말씀드렸다가 해고됐어요. 부인이 오시기 전까지 짐을 싸고 있었답니다. 그러니 사장님께서 새로운 사람을 보내시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요.”
“나가다니요. 당신, 갈 곳이 없다고 했잖아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는 몹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일단 나가서 찾아보려고요. 그래도 이렇게 부인께 털어놓을 수 있어 한결 기분이 나아졌어요. 고맙습니다. 모자도요. 평생 간직할게요, 부인.”
라비엘리는 로제만큼이나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틀어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혹은 그가 이 가여운 여인을 위해 뭐라도 해줄 수 있는지를 물으려 할 때였다.
“……으아악! 으아아악!”
멀리서 찢어질 듯한 사내의 괴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