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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61)화 (61/136)

61화

두 사람은 엘던으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간 걸어 샛길을 빠져나왔다.

라비엘리가 처음 왔을 때보다 광장은 북적거렸다.

그러나 분위기는 어딘가 어둡고 가라앉은 듯했다.

‘사람들 표정도 좋지 않고.’

농가 한편에 보이는 작은 배추밭, 한쪽에 쌓아놓은 장작과 완두콩 덤불을 눈으로 훑던 라비엘리가 손끝을 모았다.

‘내 기분 탓이려나.’

그녀는 슬그머니 루시안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도로 숙였다.

그러자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초록색 모자를 한 번 내려다보며 무심히 물었다.

“걱정됩니까?”

“에몬 씨가 아직 여관에 있으면 어떻게 하죠?”

루시안은 눈을 느릿하게 한 번 감았다 뜨더니- 

“아마 창고에 보관한 약재 때문에 온 것 같아요. 필요한 걸 다 챙겼다면 지금쯤 돌아갔을 것 같은데.”

“그랬을까요?”

“그 사람, 여관에 오래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여관 운영을 로제가 도맡아 하고 있거든요. 오랜만에 왔으니 당분간 머물렀다 가는 건 아닐까 해서요.”

라비엘리는 다시 에몬과 여관을 생각하자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럼 일단 이렇게 하죠.”

루시안이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더니 말했다.

“당신 머리, 워낙 환하고 밝아서 멀리서도 너무 눈에 띄어요.”

그의 말에 라비엘리는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뜬금없는 소리긴 해도 루시안의 말이 옳았다.

아마 밝은 금색 머리 때문에 에몬이 저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지금 당장 자를 수도 없고.”

라비엘리가 제 머리를 한쪽으로 모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루시안이 한 걸음 물러나 라비엘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 갈래로 묶거나 땋아서 가리면 좋을 것 같은데. 할 수 있죠?”

“지금은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끈도 없고, 땋는 건 혼자 해본 적이 없어요.”

라비엘리는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내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작가의 영애였을 때도, 마이어가의 후견자가 되었을 때도 늘 하녀들이 그녀의 머리를 정돈하고 묶어주었으니까.

루시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얕게 웃어 보였다.

“좋아요. 그럼 돌아봐요.”

“왜요?”

“어서요.”

“설마 당신이 묶는다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요.”

그러더니 라비엘리를 가볍게 돌려세웠다.

라비엘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루시안의 손에 이끌려 돌아서자, 그가 슬그머니 초록색 모자를 벗겨냈다.

“실례할게요, 레이디.”

“?”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차분히 속삭였다.

“나 눈썰미가 좋은 편이거든요. 어렸을 때 동네에서 여자아이들이 서로 머리를 땋아주는 걸 몇 번 봤어요.”

“설마 어렸을 때의 기억에 의존해서 내 머리를…….”

“가만히 있어요. 금방 끝나니까.”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빗 모양을 만들어 라비엘리의 머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당장 빗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그냥 돌돌 말아서 모자로 감추는 게…….”

하지만 라비엘리의 말에도 루시안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머리가 당겨졌다 풀리길 반복한다.

더하여 루시안의 손이 라비엘리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며 희미한 온기를 남겼다.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모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늦은 밤도, 은밀한 행동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자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랬다간 금방 풀려버리고 말 텐데.”

“레이디, 성격이 급하시군요.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요?”

빗질을 끝낸 루시안은 머리를 세 갈래로 가르더니 천천히 땋기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거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능숙한 손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땋은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리고는 모자로 살짝 눌러 씌웠다.

그러자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완벽하게 가려졌다.

라비엘리는 어깨에 바람이 스치는 게 어딘가 어색해 두어 번 목을 쓸어내렸다.

‘이상해.’

하지만 태연한 척 모자 속에 눌린 머리를 마저 정돈하고는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나름 괜찮네요.”

라비엘리가 무심히 말하자 루시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응수했다.

“이럴 땐, 당신 정말 못 하는 게 없군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그런 식으로는 절대, 영원히 말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만 되뇔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서려고 했을 때였다.

“라비엘리.”

“?”

“당신, 지금 이 모습 무척 잘 어울려요. 뭐랄까.”

루시안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경쾌하게 말했다.

“꼭 소년 같아요.”

“뭐라고요?”

“그것도 공을 아주 잘 찰 것 같은 소년?”

모자 속에 긴 머리를 감춘 라비엘리는 평소보다 생기있어 보였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어서 가죠.”

“어린 시절의 엘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루시안은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나른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고 이따금 피아노도 치며 자수를 능숙하게 놓는 소녀였을까.”

라비엘리는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면 공을 차고 뛰어놀기를 좋아하며 서툴지만 말타기를 좋아하는 소녀였을까.”

“서툴지 않았거든요.”

“어, 그럼 활동적인 소녀였구나?”

“…….”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말을 잘 탔습니까? 떨어지지도 않고?”

“그 일로 계속 놀릴 생각인가요?”

“아뇨, 난 그냥 당신 어린 시절이 궁금했을 뿐.”

“궁금해하지 말아요. 말할 생각 없으니까.”

라비엘리의 날 선 목소리에도 루시안은 햇살같은 미소를 보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라비엘리도 입술을 모으고는 그를 따라 움직였다.

“알레는 어디 있어요?”

“저기, 입구에 있어요.”

“설마 그냥 묶어놨어요?”

“아뇨.”

루시안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멀리 우아하게 땅을 디디고 선 말이 보였다.

그 옆에는 뉴스보이 캡을 야무지게 눌러 쓴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흙바닥을 발로 찼다가 한 바퀴 팽 돌았다가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누구지?’

얼마간 걸어 다가갔을 때, 소년은 루시안을 알아보고는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기둥에 묶인 줄을 능숙하게 풀기 시작했다.

“오셨어요?”

소년은 고삐를 건네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루시안은 소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주머니 속에서 10크랜을 꺼내 건넸다.

“내 친구를 잘 지켜줘서 고맙구나.”

“식은 죽 먹기죠.”

“다음에 또 부탁하마.”

“네.”

싹싹하게 인사한 소년은 곧장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돌아서서 루시안에게 소리쳤다.

“아, 그런데 신사분을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소년의 질문에 루시안은 설핏 웃으며 대답했다.

“마이어 씨라고 불러.”

“네, 마이어 씨. 그럼 조심히 가세요!”

소년이 시야에서 흐릿해지자 라비엘리가 루시안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새로 사귄 친구요.”

“의외네요.”

“뭐가?”

“아이에게는 솔직한 편인가 봐요.”

라비엘리는 그가 소년에게 성을 그대로 밝힌 것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이라서가 아니라 친구이기 때문이죠.”

그러더니 갑자기 라비엘리를 마주 보고 섰다.

그가 너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아 슬쩍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려 했을 때였다.

루시안이 몸을 슬그머니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나랑 내기 하나 할래요?”

“……무슨 내기요?”

“뭐든. 종목은 당신이 정해봐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라비엘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내기를 하자는 건 무슨 의미이며 심지어 종목을 제안하라니?

라비엘리가 편편한 이마를 구깃거리며 물었다.

“지금 엘던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나요?”

“맞아요.”

“그런데 갑자기 웬 내기를.”

그러자 루시안이 양손을 옆으로 벌리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은 한 필 뿐이니까.”

“……?”

“둘 중에 누가 타고 갈지 정하려고요. 내기해서 이기는 쪽이 말을 타고 가는 게 공평하지 않겠어요?”

“뭐라고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됐으니 그냥 같이 타요.”

“어쩔 수 없군요. 레이디께서 그리 분부하신다면.”

이윽고 루시안은 들고 있던 모자 두 개를 제 머리에 얹더니, 라비엘리의 허리를 잡았다.

“!”

당황한 라비엘리가 아, 소리도 내기도 전에 루시안은 그녀를 가볍게 들어서는 말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등자에 발을 디디고 가볍게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그와 말을 처음 타는 것도 아닌데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사내의 체온이 어딘가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루시안의 낮은 음성이 라비엘리의 귓전에 닿았다.

“당신 불면 바람에 날아가겠어. 돌아가면 식사부터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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