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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60)화 (60/136)

60화

라비엘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반듯한 이마를 가린 갈색 머리가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보드라운 촉감이 느껴질 만큼 우아하고 결이 고왔다.

그 아래 놓인 이목구비는 또 어떠한가.

높은 콧마루에 잘 정돈된 눈썹- 제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올 때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녀석은 어쩐지 미동조차 없었다.

라비엘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샐쭉하게 대꾸했다.

“왜요? 도망이라도 갔을까 봐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손에 쥔 것이 많고 발목 상태만 더 좋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멀리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알레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두고 온 건 제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루시안에게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 컸다.

스스로조차 깨닫지 못한 진실은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을 뿐.

“아뇨.”

루시안은 그저 짤막하게 부정하고는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라비엘리는 내색하지 않았다.

라비엘리가 그를 따라 걸음을 내딛자 루시안이 나른히 말을 걸어왔다.

“어젯밤에도 잠을 못 잤어요?”

“아뇨, 그냥 일찍 일어났어요.”

라비엘리가 대답하자 루시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을 보니 아침에 나갈 때 다행히 마주치진 않은 모양이네.”

“누굴요? 로제?”

로제라고 되묻긴 했지만, 그녀였다면 이런 식으로 묻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스친 순간이었다.

“오전에 여관 주인이 왔어요.”

“……뭐라고요?”

“에몬 질.”

루시안은 이름에 날숨을 섞어 툭 하고 내뱉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단어는 라비엘리의 가슴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말았다.

“누, 누가 왔다고요?”

라비엘리는 그제야 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현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처럼 한가롭게 마을을 구경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엘던에 에몬이 왔다는 말에 라비엘리는 더는 걸어갈 수 있는 동력을 잃었다.

그녀가 길 한가운데 우뚝 멈추어 서자 루시안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은 피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라비엘리.”

“……이럴 줄 알았어요. 결국 이렇게 될 줄. 그 사람이 왔으니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후작님께 고하겠군요. 내내 부부 행세를 하며 사람을 속였으니, 거기다 사람까지 죽였으니 절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

라비엘리는 마른 어깨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가라앉아 있던 두려움이 더는 저를 잊지 말라며 고개를 내민다.

잊지 않았으나 외면하고 있었다.

모른척하면 될 거라 믿었다.

눈앞에 선 사내와는 계속 갈등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라비엘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루시안은 라비엘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정오의 태양은 이토록 뜨거운데, 그녀의 몸은 몹시 차가웠고 연신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라비엘리.”

“…….”

“그 사람을 마주치지 않았잖아요. 당신이 여기에 있는 줄도 모르는데, 그가 어떻게 지금껏 있었던 일을 알겠습니까?”

루시안은 부드럽게 그녀를 다독였지만 라비엘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이 잊은 것 같아 다시 말하지만.”

“…….”

“사람을 죽인 건 나지 우리가 아닙니다.”

“공범이라면서요.”

“다시 생각해보니 공범보다는 나를 위해 진술해 줄 사람을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루시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정스레 웃었다.

그러자 라비엘리는 제 어깨에 올려진 루시안의 손을 치우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착각이 지나치시네요.”

“왜, 진술 안 해줄 겁니까?”

루시안이 당황한 얼굴을 꾸며내자 라비엘리가 코웃음을 쳤다.

“복잡한 일에 얽히기 싫거든요.”

“와,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면 안 된다더니, 딱 지금 상황이네.”

루시안의 과장된 목소리에 라비엘리가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당신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더 무섭네요. 마음 가는 대로 하라니.”

“그게 왜?”

“어떻게 하든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것 같아서.”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입술을 얄궂게 비틀며 웃었다.

“잊어요, 라비엘리. 우리가 입을 열지 않으면.”

“…….”

“그 일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그는 다사로운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하지만 라비엘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내가 이 말 한 적 있던가요?”

“?”

“세상에 절대 비밀은 없어요.”

라비엘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예리했다.

“맞아요. 그리고 하나 더.”

“…….”

“세상일은 단언해선 안 되죠.”

“…….”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당신은 뭐든 참 편하군요.”

“그렇게 보입니까?”

“네, 궤변을 늘어놓는 데는 선수인 데다 말로는 누구든 꼼짝도 못 하게 하죠. 의사라면서 대학에서 대체 뭘 배운 거예요?”

라비엘리가 처음보다 커진 목소리로 루시안에게 말했다.

“의대에 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개똥 같은 철학과 신학이거든.”

“…….”

“인간이 인간을 고칠 수 있는 건 전부 신의 은혜라고 믿기 때문이죠.”

“말하는 꼴을 보니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가요?”

라비엘리의 물음에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글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신께서 아시겠지.”

루시안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세워 보이자 라비엘리가 눈을 크게 떴다.

“신성모독까지 하려는 거예요? 세상에! 정말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군요.”

“있어요, 무서운 거.”

그러고는 나른히 한 번 웃어 보였다.

무엇인지 묻고 싶었으나 묻는다고 한 번에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소모적인 대화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에 라비엘리는 고개를 팽 돌렸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으나 루시안은 반대로 부드럽게 웃었다.

혼이 빠진 것 같았던 얼굴에 짜증이든, 분노든 어떤 식이든 감정이 생겼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루시안은 농담으로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듯한 라비엘리를 마주 보며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그 사람, 용무가 있어 급하게 온 것 같아요.”

“…….”

“지금도 있을지 아니면 떠났을지는 모르겠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이제 대화가 조금 통할 것 같다는 생각에 루시안은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라비엘리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에몬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의 창고에 있는 약재를 쓴 걸 알아버려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마이어가에 온다면 나를 기억해내겠죠.”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어깨를 안으로 모은 채 말이 없었다.

“이쯤 되니 마이어가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지네요.”

“그게 무슨 말이죠?”

“후작께서 지금껏 가만히 계셨을까? 아마 서신을 보내 당신이 잘 있는지를 물었을 거예요.”

“그럼 저는…….”

“걱정하지 말아요. 만약 나와 함께 갈라테이아에 갔다고 하면, 후작께서 부탁하신 일 때문이었노라 얘기하면 되니까. 저택에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면 그걸로 끝이죠.”

라비엘리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루시안과 나란히 걷고 있었으나 그를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말을 타고 저택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완전히 얽히고 말았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라비엘리?”

“그럼 지금 엘던에 돌아가서 메이지에게 편지를 보낼게요.”

그녀의 말에 루시안이 싱그러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라비엘리는 조금 전보다 단단해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 그편이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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