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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59)화 (59/136)

59화

라비엘리는 산 것 중에서 제일 간편해 보이는 초록색 모자를 머리에 쓰고 나머지 두 개는 한데 모아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정처 없이 광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곧 태양이 머리 위에 뜰 것이고 강렬한 볕을 피하려면 모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고 생각하면서.

“제법 가볍고 괜찮은데.”

그러고는 남은 모자 두 개 중 하나는 로제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늘 다 낡은 면직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잘된 일이었다. 발목은 거의 다 나았고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으니 선물로 주면 될 것이다.

“로제…… 괜찮겠지.”

그러다 문득 늘 지친 얼굴의 로제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에몬의 여관만 아니었다면, 함께 마이어가로 가지 않겠냐고 제안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집안의 하인이나 하녀를 들이는 건 보통 집사가 도맡아 했기 때문에 데려가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메이든이야 비사교적인 데다 좀처럼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제가 데려온 하녀를 내칠 만큼 융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루시안의 힘을 빌려도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로제는 그녀를 루시안의 부인 몰리 이아신스로 알고 있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라비엘리. 지금 네 처지도 잊고…… 마치 다시 백작 영애라도 된 줄 착각하는 거야?’

라비엘리는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저었다.

로제가 가엾기는 해도 이곳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지 않은가.

제 불행한 삶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자칫 우울 속으로 빠져들 뻔했으나 계속 걷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아침 햇살 덕분인지 라비엘리는 금세 울적한 기운을 털어냈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는 발목을 쓰지 못할 만큼 아팠고 퉁퉁 부어 있었는데, 고작 며칠 만에 이만큼이나 회복된 것이 신통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루시안의 솜씨는 제법 훌륭했다.

‘적어도 의사라는 사실은 거짓이 아닌가 봐.’

보기에는 사기꾼처럼 보여도 의술만큼은 꽤 쓸만하다고 생각하자 테아노의 그림자가 얼핏 스치었다.

20여 년을 떨어져 살았지만, 그의 아들이기 때문일까.

훌륭한 의술을 피에서 피로 물려받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이내 라비엘리는 고개를 저으며 그러한 생각에서부터 벗어나려 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적어도 지금은 자유롭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갔을 때였다.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걸어온 탓인지 몹시 허기가 졌다.

하지만 수중에 남은 돈은 겨우 2크랜, 허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모자를 세 개나 산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여인은 모자를 팔아 23크랜을 벌었으니 아이는 아침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귀여운 꼬마 친구는 아침을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인데…… 그럼 나는 2크랜으로 뭘 먹을 수 있을까?”

라비엘리는 손에 든 모자를 앞뒤로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모자를 샀던 가판처럼 과일이나 빵을 파는 가판을 찾으며 얼마간 걸어갔을 때였다.

멀리 덤불 숲과 나무, 그리고 보리수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고 아담한 규모의 사원이 보였다.

울타리 너머로 조심스레 고개를 빼자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무언가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분주해 보이는 것이, 평소 사원의 모습과는 달랐다.

라비엘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크고 작은 사원과 신전 등을 전전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의 부모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전부 헛수고였다.

신은 응답하지 않았고, 힘겨운 시간만 애석하게 흘러갔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쓸모없는 호기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라비엘리는 돌아서지 못했다.

동시에 이곳이 외부인에게도 개방된 사원이라면 들어가서 간단한 축성이라도 받고 싶었다.

‘외진 곳에 있어서 개방된 곳인지 아니면 수도사들이 기도만 올리는 곳인지 알 수가 없네.’

사실 무엇이든 좋으니 마음의 안식을 찾고 싶었다.

보리수 울타리를 헤치고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자 등을 돌리고 선 채 대화를 나누는 사제들이 보였다.

“아무래도……가 맞겠지?”

“대신전에서 사람이 나올 정도면 그렇겠지.”

“큰 탈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신관께서 오시거든 뭐든 지시가 있으시겠지. 지금 당장은 광역 정화를 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저도 모르게 사제들의 대화를 엿듣고만 라비엘리는 부러 인기척을 내려 헛기침을 했다.

사제들이 고개를 휙 돌렸을 때, 라비엘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얼굴인데 외지에서 오셨습니까?”

“아, 네. 저는 엘던에서 묵고 있어요.”

“엘던이요?”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러시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혹시 사원에서 기도를 올리거나 축성을…… 받을 수 있을까요?”

라비엘리의 청에 사제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하군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긴급한 사안이 있어서.”

그러고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어색하게 홀로 남은 라비엘리는 잠시 멍하니 서서 사원을 바라보았다.

‘뭔가 일반적인 사원의 분위기와는 확실히 다른데.’

긴급한 사안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으나 라비엘리는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가 맥없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아.”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짤막한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돌아선 곳에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루시안.”

늘 우아하게 빗질해 넘긴 머리는 다소 헝클어져 있었고 두 뺨 역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잘 알고 있는 얼굴인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그가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 건 처음이었다.

왜, 라는 의문에 답을 찾을 겨를도 없이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안녕, 레이디.”

라비엘리는 다소 지친 기색을 감추고는 비뚜름한 목소리를 냈다.

“……날 용케 찾았네요.”

“이 마을에서 모자 장수라도 할 생각입니까?”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의 말뜻을 깨닫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에 쓴 것도 모자라 손에 두 개나 쥐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아뇨, 이건…….”

라비엘리는 사실대로 말하려다 말고 어깨만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어쩐지 조금 전의 일을 그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네, 먹고 살려면 뭐든 해야 하니까.”

굶주린 아이가 눈에 밟혔고, 그래서 가진 돈을 몽땅 털어 모자를 샀다는 이야기는 해봐야 놀림만 받을 것이다.

장사치들이 뻔히 쓰는 수법에 당했노라고, 순진한 아가씨라며 놀려댈 것이 분명했다.

말하지 않으면 알지도 못할 텐데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왜 모자입니까?”

“지금 볕이 뜨거우니까요. 하나 살래요?”

라비엘리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루시안에게 빨간색 모자를 하나 불쑥 내밀었다.

“아뇨, 여자 모자에는 흥미가 없어서.”

루시안이 시큰둥하게 대꾸했지만, 제가 뱉은 말과는 반대로 라비엘리가 쥐고 있던 모자를 빼앗듯 가져왔다.

그러자 라비엘리는 어쩔 수 없다는 눈을 하고선 그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알레는요? 혹시 걸어왔나요?”

“당신이 두고 갔으니 내가 타고 왔습니다만.”

“아쉽네요. 내가 탈걸.”

“왜, 남은 발목도 다치려고요?”

“뭐가 문제겠어요. 의사 선생님이 있으신데.”

라비엘리는 풋, 하고 공기를 흘리며 웃었지만 정작 등 뒤에서 걷고 있는 루시안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나저나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어차피 손에 쥔 것도 없으니 적당히 구경하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슬슬 발목이 욱신거리는 탓에 돌아갈 길이 막막하긴 했지만.

등 뒤로 루시안이 저를 따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박자박 흙을 밟고 풀을 짓누르는 소리는 묘하게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맞춰봐요.”

그야 갈 곳이라고는 엘던에서 보이는 마을이 이곳뿐이었으니까.

“내 신발에 실이라도 묶어놨나요?”

라비엘리가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면 발자국이라도 추적했어요?”

“라비엘리.”

그때, 그녀를 따라오던 발걸음 소리가 뚝 멈추었다.

그가 멈추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계속 나아가던 라비엘리는 앞으로 서너 걸음을 더 걸어갔을 때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았을 때, 갈색 머리의 사내는 흐리고도 강렬하게 내리쬐는 볕을 그대로 받으며 우뚝 서 있었다.

“…….”

라비엘리가 그를 마주하고 서자 루시안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걱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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