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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58)화 (58/136)

58화

루시안이 알레를 타고 엘던에서 멀어진 사이, 약재를 전부 챙긴 에몬 역시 떠날 채비를 마쳤다.

마차에 짐을 실어 넣고는 손을 탈탈 털었을 때였다.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에몬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초조한 얼굴을 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레브리안의 과거를 추적해 제가 떠나기 전까지 가져오라고 했다. 신전에서 일하는 계집의 과거야 뻔한 것이니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레브리안을 보러 가기 전에 알고 싶었는데, 에몬은 제 계획이 틀어진 것 같아 영 기분이 좋지 못했다.

물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레브리안을 원하고는 있었지만-

밥을 먹고 입을 닦지 않을 것처럼 찜찜한 기운을 계속 안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차 문을 거칠게 닫은 에몬이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로제가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이제 돌아가세요?”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창고를 열어주는 일이 있으면 바로 잘라버릴 줄 알아.”

에몬의 으름장에 로제는 한쪽 볼을 긁적였지만, 겁을 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혼자 엘던을 꾸려가는 데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는 데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만두고 농장이나 공장에 간다면 지금보다 돈은 못 벌겠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을까.

홀로 엘던을 꾸려가는 건 단순히 몸이 고단하고 힘든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 끝에 로제가 아랫입술을 부룩 내밀자 에몬이 눈을 부릅떴다.

“로제?”

로제는 체념한 얼굴로 두 손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네.”

그녀의 불퉁한 대답에 에몬의 눈빛이 순간 매섭게 변했다.

“로제?”

“알겠다고요.”

“뭘 알겠다는 거야!”

에몬이 바락 화를 냈을 때였다. 로제가 돌연 에몬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

“사람을 더 뽑아주세요.”

“……뭐?”

“이렇게 넓은 여관을 저 혼자 관리하는 게 말이 안 돼요. 수도 없이 사람들이 오가는데 청소부터 빨래, 식사까지 챙겨야 하고 정작 저는 밥 먹을 시간도 없다고요.”

“뭐야?”

“청소하는 하인이라도 한 명 뽑아주세요. 아니면 식사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도요.”

“지금까지 해놓고 이제 와 무슨 소리야?”

“여기 온 지 3년이나 됐어요. 더는 못하겠으니 그래요. 사장님은 제 얼굴이 이렇게 축난 게 보이지도 않으세요?”

로제가 볼이 오목하게 마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에몬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몸살 때문에 꼼짝도 못 할 만큼 아파도, 심한 감기 때문에 기침을 달고 살면서도 그녀는 에몬에게 불만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옳은 줄 알았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어디에서 생겼을지 모를 용기가 샘솟아 에몬에게 맞서고 있었다.

“뭐야?”

에몬 입장에서야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적은 돈으로 엘던을 잘만 꾸려왔는데, 이제 와서 돈을 더 써서 사람을 고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일이 그럼 다 힘들지, 남의 돈 받는 게 뭐 쉬운 줄 알아?”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고요.”

로제는 가느다란 손목을 내보이며 중얼거렸다.

퉁퉁 부은 손가락 마디를 보여주면 마음이 변할까, 그러면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알아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에몬은 로제의 손은 쳐다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다 죽어가는 걸 데려다가 편하게 여관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돈까지 버니 이제 보이는 게 없나 보지?”

“…….”

“이봐,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모르겠어?”

에몬은 마차 문을 소리 나게 닫으며 로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 애비가 진 빚 때문에 어떻게 살았는지 잊었어? 다시 사창가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

“월급 주고 인간 취급해주니까 진짜 인간이라도 된 줄 알아?”

에몬이 소리를 지르자 로제는 눈물을 깨물고 숨을 참았다.

늘 해오던 일인데 왜 갑자기 버겁게 느껴진 것일까.

아니, 사실 버거웠지만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아 제 속이 곪아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로제는 제가 얼마나 고단하게 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물론 에몬의 여관에서 일을 하기 전에는 더 형편없는 삶을 살았다. 그건 에몬의 말이 옳다.

하지만 자그마치 3년이나 박봉을 받으며 일을 해왔다.

로제가 오기 전보다 엘던은 번창했고, 갈라테이아에 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들리는 곳이 되었다. 수다스럽긴 해도 성실하고 손이 야무진 로제 덕분이었다.

에몬 같은 능숙한 장사꾼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로제를 내보낼 생각도, 다른 사람을 고용할 생각도 없었다. 사실 본심은 어떻게든 그녀를 여기에 주저앉히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단단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어르고 달래서는 될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녀에게 끌려갈 수는 없지.

에몬은 회색 목면 조끼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 같은 년 필요 없으니 꺼져. 여기서 당장 나가.”

“사장님.”

“배은망덕한 년 같으니.”

“아아, 사장님, 잘못했어요!”

로제는 에몬에게 매달렸으나 그는 거칠게 밀어냈다.

“당장 짐 싸서 나가. 길바닥에서 빌어먹든 사창가로 기어들어 가든 네년 맘대로 해!”

“아아, 사장님……!”

에몬은 바닥에 주저앉은 로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로제는 마차가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고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 *

쥐똥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샛길에 도착했을 때 라비엘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섰다.

“휴…….”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자 지방 도시의 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여기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벽돌로 지은 집과 광장이 나올 것이다. 라비엘리는 샛길을 지나며 여길 넘어가면 어떤 풍경이 그려질 것인지를 상상했다.

얼마간 더 걸어가자 처음보다 분주해 보이는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화려해 보이는 가게와 상점들을 지나쳤다.

점원들은 전부 밖으로 나와 유리창을 닦으며 하루를 준비했고, 바구니를 든 행상들도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분주한 가운데 그녀의 목적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절뚝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걸을만했다. 언제 발목에 통증이 치밀어오를지 모르나 아직은 엘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 제 마음속에 돌아갈 의지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고.

로제가 빌려준 밀짚 슬리퍼만 있었다면 여기까지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라비엘리는 슬쩍 고개를 숙여선 반들반들한 가죽신을 내려다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루시안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새 신발을 사준 것도, 아마 신고 어디든 나가라는 의미겠지.

라비엘리는 그렇게 오늘 아침 새 가죽신을 주워 신고 밖으로 나왔다.

“모자 사세요, 모자. 아가씨, 예쁜 모자 하나 사세요.”

가까이에서 들리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인상 좋은 아낙이 가판에서 모자를 팔고 있었다.

빳빳하게 풀 먹인 모자, 푸른색 리본으로 장식이 된 모자, 비단으로 만든 모자, 크레이프가 달린 모자까지.

“어서 오세요, 아가씨. 아가씨의 황금색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리는 모자를 추천해드릴게요.”

여인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색 비로드로 만든 모자를 내밀었다. 그녀의 웃음을 외면하기 어려웠으나 수중에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품 안에는 고작 25크랜이 전부였다.

만약 마음이 바뀌어 엘던으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보니, 고작 모자를 사는 데 크랜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안해요. 다음에…….”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골라봐요. 예쁜 아가씨에게는 특별히 싸게 해줄 테니.”

이런 식의 거절을 해본 적이 없는 라비엘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가판 아래에서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엄마.”

하지만 여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라비엘리가 의아하게 돌아보던 찰나였다.

“이리 와요, 빨간색이 별로면 다른 걸 보여줄게요.”

“……엄마, 배고파.”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홀린 듯 가판이 있는 곳으로 가자, 안쪽에 작고 마른 여자아이가 웅크린 채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라비엘리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향한 것을 본 여인은 치맛자락으로 아이를 황급히 가렸다.

“아가씨, 이건 면비로드에요. 일단 비로드보다 저렴하답니다.”

“얼만가요?”

“초록색은 5크랜이에요, 크레이프가 달린 건 8크랜이고요.”

“……이 빨간색은요?”

“그건 10크랜이요. 비로드는 조금 비싸요.”

그때, 치맛자락을 비집고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까맣고 마른 아이는 잘 먹지 못했는지 몹시 야위어 보였다.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게 세 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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