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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57)화 (57/136)

57화

루시안은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내 던지듯 이불을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방 안을 살폈다.

어느덧 아젤디노의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머리가 아득해졌다.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널린 찻잔, 완전히 타버린 램프의 초와 특별할 것 없는 가구, 창문 너머로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과 오래된 호두나무 한 그루.

방 안의 풍경도 창 너머의 것도 어제와 특별히 달라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다 무언가 번뜩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제는 있었지만, 오늘은 보이지 않는 것. 제가 들고 온 상자와 가죽신이었다.

‘설마.’

루시안은 평소답지 않게 거친 손놀림으로 방 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침대 아래서 빈 상자를 발견했다.

석류색 가죽신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아직 식사가 올라오기도 전인 이른 시간이었다. 게다가 몸도 성치 않은데 대체 어디에 간 것일까.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루시안이 1층을 지나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을 발칵 열려던 순간이었다.

“아, 이봐요.”

저를 붙드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풍채가 좋은 사내가 루시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침에 정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 <엘던>의 주인 에몬이었다.

루시안이 그를 쳐다보자 에몬은 잠시 멈칫하였다.

그는 마치 가을의 들녘 같은 온화한 갈색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나 두 눈은 몹시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인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법한 말갛고 고운 피부에 잘 뻗은 콧날과 적당히 발그스름한 입술까지.

에몬은 잠시 사내의 외형에 취해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무슨 일이시죠?”

루시안은 에몬이 말없이 저를 응시하자 눈매에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처음부터 에몬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마주한 이상 그에게 호의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라비엘리는 처음부터 <엘던>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했다.

엘던은 에몬이 운영하는 곳이고, 그는 테아노와 무척 밀접한 관계인 탓이다.

지금이야 루시안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지만, 훗날 제가 테아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나중을 생각하면 에몬과는 좋은 기억을 쌓아두는 것이 옳았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에몬은 정중하면서도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는 걸 루시안은 모르지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로제에게 들었습니다. 의사라고 하시던데.”

다행히 에몬은 성질이 급한 자였다.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고는 불쑥 제 용건을 꺼낸 탓에 루시안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린 뻔했다.

그가 저를 불러세운 이유를 뻔히 알 것 같아서였다.

“아, 급히 필요해서 당신의 창고에서 벨라도나와 카시아를 조금 빌려 썼습니다. 비용은 로제에게 미리 지불했고요.”

“네,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쪽에 사시는 분이 아니신가 봅니다. 제가 이 근방 의원들 약재는 전부 대고 있거든요. 처음 뵙는 분이신데.”

“힐에서 왔습니다.”

“오, 그러셨군요. 힐이면 로제토스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곳 아닙니까?”

“네.”

“세상에, 아주 멀리에서 오셨군요. 사냥을 하러 오셨나요?”

“그런 셈이죠.”

“적당히 서늘한 게 사냥하기에 딱 좋은 날씨지요. 이렇게 엘던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루시안은 적당한 미소로 받아주고는 있었지만 사실 몹시 초조했다.

일단 라비엘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데다, 그녀가 갑자기 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서였다.

물론 그에게는 라비엘리와 함께 있는 이유를 태연하게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지만, 그녀가 걱정되었다.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할 테고 불안에 떨 것이다.

가까스로 감정의 둑을 쌓아가고 있는데 다시 무너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럼 저는…….”

“아, 부인께서는 좀 괜찮으신가요?”

에몬은 루시안과 조금 더 대화를 하고 싶은지 말을 이어갔다.

그의 생각이야 뻔한 것이었다.

의사와 가까이 지내면 사업을 확장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니 말이다.

게다가 힐은 로튼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가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 미지의 땅에 발을 내딛는 상상을 하며 에몬은 빙긋 웃었다.

“네, 덕분에요.”

“아이고, 잘되었군요. 그런데 귀하신 부인께서 어쩌다가.”

라비엘리에 관해선 말을 아끼고 싶었으나-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세상에, 낙마 사고를 당하셨군요. 큰일 날 뻔하셨네요.”

루시안 역시 그가 제게 친절을 베푸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 역시 에몬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 말을 상대해주고는 있었지만, 부인에 관한 것을 묻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참말로 다행이에요. 저희 여관에 묵으시는 동안 불편함은 없으셨나요? 제가 여기 주인이니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없습니다. 고마워요.”

그대로 나가려던 루시안은 잠시 멈칫하였다.

그의 표정을 보아선 라비엘리를 마주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로제는?

당장 로제를 찾아 아침에 라비엘리를 본 적 있는지, 혹시 어디 가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에몬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라비엘리가 아니라 몰리 이아신스 부인이라고 알고 있지 않은가.

‘젠장.’

루시안은 입술을 길게 늘인 뒤 고개를 한 번 숙였다.

몸은 여관 안에 있었지만, 정신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가 라비엘리를 찾고 있었다.

이윽고 문가로 향한 루시안이 문고리를 쥐자 에몬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말이 많긴 해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나무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해가 뜬 덕분에 주변은 환했으나 라비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시안은 천천히 거리를 살피다 혹시나 싶어 마구간으로 향하였다. 멀리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음성이 간간이 섞여 들려왔지만 루시안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라비엘리.

행여 알레가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다.

만약 그녀가 알레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이내 제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이 완전히 불안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비엘리, 말을 타고 멀리 떠나요.

라비엘리, 아냐. 제발 떠나지 말아요.

라비엘리, 여기서 도망쳐.

라비엘리, 내 곁에 있어.

결코 전할 수 없는 무수한 말들이 사정없이 충돌하고 있다.

마구간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은 막연한 암흑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가 마이어가의 안주인이 되든, 후작 부인이 되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라비엘리, 떠나도 좋아. 그래 어디로든 멀리 떠나버려.

하지만 지금은 안돼.

지금은 아냐.

두렵고도 초조한 마음으로 걸음을 빨리하고 있을 때였다.

“……알레.”

알레는 어제 루시안이 매어놓은 모양 그대로 얌전히 있었다.

“옳지.”

루시안은 제 불안을 감추려는 듯 알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알레는 루시안을 알아보고는 푸르르 입을 털며 얼굴을 비볐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루시안은 생각에 잠겼다.

말을 탄 게 아니라면 여기서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갈라테이아 산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면 포장된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을 수도 있다. 여관에서 보이는 농가와 이제 막 덧문을 열기 시작한 집들을 천천히 살피던 루시안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알레, 네 주인님 찾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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