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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56)화 (56/136)

56화

창고로 내려온 에몬은 서둘러 약초를 챙기기 시작했다.

클라인이 요구한 양을 맞추기 위해선 제가 가진 것을 몽땅 털고 약초꾼들 역시 전부 동원해야 했다.

빨리 약초를 준비해야 레브리안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에몬은 몹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잡아보았던 그녀의 손, 그 보드라운 촉감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레비, 레비…… 나의 아름다운 레비.”

어쩐지 그녀와 함께 있을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간절함은 진해지고 있었다.

레브리안에게는 얼마든지 기다리겠노라 얘기했으나 사실 에몬은 오래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금실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양손에 쥐고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 싶었다.

오직 레브리안의 향기로 제 폐부가 가득 차도록-

그녀를 생각하자 에몬은 잠시 정신이 멍해지고 움직임도 느릿해졌다. 레브리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배꼽 아래 나른한 기운이 스민 탓이다.

“에라이, 미친놈아. 정신 차려.”

에몬은 제 뺨을 두어 번 두들긴 뒤 닫힌 서랍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에몬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약초를 구하는 일 말고도 사람을 시켜 레브리안의 과거도 캐내야 했다. 그사이 클라인이 레브리안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도 알아봐야 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어떻게든 확답을 받아야겠어. 만약 이번에도 생각해본다는 말 따위를 한다면.”

약초를 담던 손이 느릿해진다.

에몬은 레브리안과는 도저히 매칭이 안 되는 그녀의 주정꾼 아버지를 떠올렸다.

“가만, 오늘이 며칠이지?”

그는 약초와 여관 등의 사업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돈을 가장 많이 벌어다 주는 건 고리대금이었다.

에몬은 남을 잘 믿지 못해 이자를 챙기고 돈을 받는 일 따위를 전부 본인이 직접 했다.

“헤르젠을 족치는 수밖에 없지.”

그는 저와 약속한 날까지 절대 돈을 준비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레브리안이 끝까지 결혼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헤르젠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팬 뒤, 아비가 갚지 못하는 빚은 자식에게 대물림된다는 걸 알려줄 것이다.

“사랑스러운 레비, 물론 난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그는 손에 쥔 약초가 마치 레브리안이라도 되는 양 천천히 손에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하지만…… 당신 아버지는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해.”

에몬은 돈 이외의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돈만큼 솔직하고 정직하며 위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돌연 위에서 로제와 나누었던 말이 떠올랐다.

‘얼굴에 주름이 많고 코가 뾰족한 게…… 낯빛이 조금 창백하고 수염은 좀 지저분했고요.’

로제가 설명한 인물은 바이젤 루오가 분명해 보였다.

물론 에몬이야 바이젤이 여관에 오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에몬에게 빚을 진 사람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바이젤이 에몬에게 품은 감정은 에몬만큼 가볍지만은 않았다.

바이젤은 피카르디에서 농사를 짓던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가진 것이라곤 귀퉁이가 썩어빠진 낡은 오두막이 전부였지만, 일고여덟 살 먹은 아들과 부지런한 아내와 함께 그럭저럭 살았다.

바이젤에게 불행이 찾아온 건 몇 달 전 봄이었다.

그의 아내는 본래 몸이 약했는데 무리하게 일을 하다 병을 얻고 말았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던 바이젤은 백방으로 약을 썼지만 조금도 효험이 없었다.

처음엔 의사에게는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에몬에게서 약을 사다가 먹였으나 병세는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에몬에게 돈을 빌려 의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바이젤은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테아노에게 진료를 받기를 원했다.

‘이제 어떤 약도 듣질 않아요. 인근의 의원은 다 찾아다녔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은 테아노 후작님뿐이에요.’

‘하지만 후작님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자네 같은 사람이 진료를 보려면 최소한 500크랜은 있어야 하는데 가능하겠나?’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지요.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한 번만이라니. 나는 자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믿을 곳은 에몬 씨밖에 없어요.’

‘감사는 무슨. 자네 아내가 낫는 게 우선이지. 그런 말은 말게.’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에몬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테아노는 일이 있어 수도로 떠난 직후였다.

에몬은 당장 테아노의 진료를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이젤에게 돈을 넘겼다.

그에게 중요한 건 바이젤이 불어난 돈을 어떻게 갚을 수 있느냐이지 아내가 치료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테아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던 바이젤은 절망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의 아내는 느지막이 얻은 어린 아들과 산더미 같은 빚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죽은 직후 에몬은 착실하게 바이젤을 독촉했다. 하지만 남은 돈마저 아내의 장례비로 쓴 탓에 이자조차 낼 형편이 못되었다.

바이젤의 아내가 세상은 떠나고 딱 7일 뒤, 에몬은 그의 아들을 노예상에 팔아넘겼다.

‘주제도 모르고 빚을 냈으니 당연한 결과 아닌가.’

에몬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게 애원하던 바이젤의 마지막을 지워버리며 혀를 찼다.

그 딱한 사내가 <엘던> 3층에 있다는 게 꺼림칙하긴 했으나 에몬이 느끼는 감정은 딱 거기까지였다.

설마 저를 찾아왔나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3층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1층 인근을 서성거렸을 것이다.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에몬은 머리를 두어 번 털어내고는 다시 약초를 챙기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파벨 버섯 두 묶음, 벨라도나, 카시아……. 잠깐, 카시아가 이것밖에 없었나?”

나무 서랍에 차곡차곡 정리해 둔 약초를 순서대로 꺼내던 그는 잠시 멈칫하였다.

<엘던>의 창고에는 보관하기 위한 용도라기보단 비상용으로 약재를 넣어둔 만큼 양이 많지 않았다.

적은 양으로도 탁월한 진정 효과가 있는 카시아가 묘하게 줄어든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카시아는 찻잎이 아닌데도 근래 귀부인들 사이에서 차처럼 마시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마치 합법적인 마약과 같은 느낌으로 모여앉아 나른해지는 감각을 즐겼던 것이다.

“설마 로제가 손을 댔나?”

에몬은 창고 문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입술을 비뚜름하게 구겼다.

그는 일단 약재를 남김없이 쓸어 담은 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로제, 로제!”

카운터에 놓인 종을 마구 치자 주방에 있던 로제가 후다닥 튀어나왔다.

“네, 네. 가요.”

“로제, 나 없는 동안 누가 내 창고에 손을 댔나? 저 약재를 모아두는 서랍 말이야.”

로제는 귀신같은 에몬을 속이는 일 따위는 애초에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저는 루시안에게 티 나지 않게 조금만 쓰라고 했고, 그가 가지고 나온 양 역시 한 줌도 안 되는 양이었다.

미리 돈을 받아두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로제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뭐야, 내 약재에 손을 댔어? 설마 카시아 잎을 가져다 먹은 거야?”

에몬이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자 로제가 두 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라 투숙객 중에 의사가 있으신데 부인께서 다치셨거든요. 엘던 주인이 사장님인 걸 알고 계시니 여기 약초가 있는지도 물으셨어요.”

“그래서?”

“약, 약초를 조금 쓰면 부인께서 조금 더 편하게 주무실 수 있다는데…… 그분들은 아주 상냥하고 좋으신 분들이었거든요. 아, 그리고 미리 돈도 지불하셨고요.”

그러자 에몬은 로제를 노려보았다.

“그 얘기를 왜 지금 하는 거지? 내가 말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나?”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너무 오랜만에 오셔서 보고해야 할 것도 많았고, 그리고 고, 곧장 창고로 가셨잖아요.”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거야?”

에몬이 쏘아붙이자 로제는 입을 꾹 닫고 눈썹을 있는 대로 내렸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아, 조금 전에 2층으로 올라갔던 그 갈색 머리 남자분이요. 그분이 의사세요.”

“그래?”

에몬은 조각상처럼 매끈하고 잘생긴 사내를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의사 부부라고?”

“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묵고 있지?”

“2층이요. 제일 좋은 방을 내어드렸어요.”

로제가 대답하자 에몬은 묘한 표정으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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