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다음 날은 목요일이었다.
루시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창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해 뜰 녘의 희미한 빛이 거리를 감돌고 농가들은 막 덧문을 열고 있었다.
그는 건조한 얼굴로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시계를 손목에 찼다. 아침 대신 뜨거운 차나 한 모금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즈음, 멀리서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벽시계는 여섯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머, 벌써 나오셨어요.”
1층으로 내려가자 무명 모자를 쓴 로제가 눈을 비비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낡아빠진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루시안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의 습한 기운이 훅 밀려와 루시안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여관 인근의 풍경을 눈으로 익히고 있을 때였다.
멀리 말 세 마리가 달음질로 뛰어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바퀴가 연신 돌들에 박혀 삐걱거리고 마차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마부의 성질이 급한 것인지 아니면 마차의 주인이 문제인지를 생각하는 사이, 마차가 <엘던> 앞에 멈추어 섰다.
마부가 마차를 세우자마자 문이 다 열리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사내 한 명이 튀어나왔다.
“젠장, 빨리. 빨리 좀 하라고!”
그는 가죽 부츠를 거의 무릎까지 올려 신고 있었는데, 투박하고 급한 몸가짐에 비해 머리는 제법 단정하게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에몬은 문가에 서 있는 루시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로제! 로제, 어디 있지?”
그는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것도, 밖에 손님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서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지 무작정 로제를 불러댔다.
“로제!”
“네, 네. 가요.”
멀리 로제의 음성이 들려왔다.
산더미 같은 빨래를 내버려 두고 사장의 부름에 달려온 모양이었다.
“세상에, 기별도 없이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세요. 아, 아니지, 어서 오세요.”
로제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더니 모자를 바로 쓰는 둥 호들갑을 떨었다.
에몬은 로제에게 인사다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는 엘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손님은 좀 있었나?”
“네, 장기 투숙하시는 분들이 좀 계셨어요.”
“그래? 외상은.”
그는 늘 로제가 앉아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는 장부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대충 훑기만 하는 것 같았지만 누구보다 꼼꼼히 보고 있다는 걸 로제는 알았다.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외상 손님은 안 받았어요.”
“창고 열쇠.”
“여기요. 참, 그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로제는 주머니를 뒤적여 창고 열쇠를 꺼내 에몬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들어온 손님인데 영 꺼림칙해서요.”
“왜?”
에몬은 창고로 내려가려다 말고 로제를 돌아보았다.
“일주일 묵는다고 했거든요. 숙박료와 식비는 전부 선불로 계산했고요. 식사는 시간 맞춰 문 앞에 두고 청소도 따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식사를 문 앞에 두어도 손도 대지 않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더라고요.”
“그게 뭐가 문제지?”
에몬은 양미간을 있는 대로 접으며 로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로제는 이미 그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도 없고요, 뭔가 꺼림칙해요.”
“선불로 다 냈다면서.”
“네.”
“식비는? 식비나 세탁비도 한 번에 냈나?”
“네, 전부 다 냈어요.”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로제, 한가한가 보지? 손님이 밥을 먹나 안 먹나까지 전부 신경 쓸 만큼?”
에몬이 윽박지르자 로제는 입술을 쪼그리며 바짝 모았다. 그녀는 에몬의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하지만 여관에서 목을 맨 사건들이 꽤 있잖아요. 만약 3층에 있는 사람이 그런 목적으로 들어온 거라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시체를 처리하는데 비용도 들 테고요.”
로제는 에몬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시체를 처리하는데 돈이 들 거란 소리에 에몬이 한쪽 볼을 씰룩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로제가 말을 이어갔다.
“식사를 가져가지 않길래 여러 번 문을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더라고요. 물론 열쇠는 있지만, 저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어쩐지 겁이 나서. 정말 사람이 죽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젠장.”
에몬은 머리를 거칠게 한 번 헝클이더니 창고로 가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 확인했던 장부를 다시 뒤적이기 시작했다.
“언제 들어왔지?”
“17일이요. 그러니까…… 여기.”
로제는 조르르 걸어서는 손가락으로 사내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가리켰다.
“뭐야, 바이젤 루오? 이 작자라고?”
“네.”
이름을 확인한 에몬은 거칠게 장부를 덮었다. 그러더니 로제에게 따지듯 질문을 연사했다.
“아니지, 이름만 같을 수도 있으니. 그자의 생김새는 어땠지? 키는? 체격은?”
“키는 한 이 정도?”
“그리고? 생김새는?”
“얼굴에 주름이 많고 코가 뾰족한 게…… 낯빛은 조금 창백하고 수염은 좀 지저분했고요.”
“머리 색은?”
“머리 색은…… 아 저 신사분보다 조금 더 진한 갈색이었어요.”
그 사이 루시안은 두 사람을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키가 몹시 훤칠하고 매끈한 루시안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에몬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댔다.
“하…… 내가 얼굴만 조금 더 하얬어도.”
“네?”
“아냐, 바이젤 루오가 맞는 것 같은데. 그자가 대체 왜 여기 온 거지? 내가 하는 여관이라는 걸 모를 리도 없고.”
에몬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로제가 급히 그를 뒤따르며 물었다.
“아시는 분인가요?”
“신경 쓸 거 없어. 자살은커녕 날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놈이니까.”
“아.”
“음식에 손도 대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 둬. 아까운 음식 낭비하지 말고.”
“하지만 식비는 전부 선불로 내셨는데요.”
로제가 덧붙이자 에몬이 그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로제는 다시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일 말고는 특별한 일 없었나?”
에몬의 말에 로제는 잠시 2층에 묵고 있는 여인과 그의 남편을 떠올렸다.
몰리 이아신스 부인이 부군과 사냥을 가던 중 낙마 사고를 당해 이곳에서 계속 머물고 있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근에 살인 사건이 벌어져 병사가 왔다는 건 이야기해야 할까?
로제가 망설이는 사이, 에몬은 벌써 창고로 내려가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고 있었다.
원래도 급한 성미였는데 오늘따라 그는 더 초조하고 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저는 그럼 빨래를 좀 하러 가볼게요.”
로제는 에몬의 등 뒤에 대고 소리친 뒤 곧바로 돌아섰다.
얼마 전 루시안이 에몬의 창고에 들어간 일도 생각났지만, 티 나지 않게 조금만 가져다 쓴다고 했으니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
* * *
똑똑.
루시안은 잠시 문 앞에 서서 라비엘리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녀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간 서서 기다리던 루시안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손잡이를 비틀었다.
문을 여는 순간, 제가 어제 남기고 간 아젤디노의 은은한 향내가 물씬 풍겨왔다.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이 향기에 취해 숙면했길 바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쯤이면 일어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라비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어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램프의 초는 중간에 끄지 않았는지 완전히 녹아내려 있었다.
침대로 시선을 돌리자, 포슬포슬한 이불이 둥글게 올라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간밤에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잠에 취해 있는 모양이었다.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그만두었다.
늦게 잠이 들었다면 아침 식사를 하는 것보다 자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에서였다.
대신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널린 찻잔을 정리하는데 그녀에게 새로 사준 가죽신과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치워놓았나 보군.’
소리 나지 않게 의자를 당겨 앉아 라비엘리가 묵고 있는 방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공간을 가득 메운 아젤디노의 풀 내음 속에 어렴풋이 라비엘리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생기를 잃고 시들고만 가련한 여인의 향기였다.
그러다 돌연 침대로 고개를 돌렸을 때, 반듯하던 루시안의 얼굴이 슬며시 구겨졌다.
그는 조심성 없이 빠르게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이불 끝을 움켜쥐었다.
“라비엘리?”
휙 하고 이불을 걷어내자 침대 위는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