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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54)화 (54/136)

54화

라비엘리의 두 뺨은 여위었고 안색 역시 파리했으나 루시안을 향한 두 눈만은 예민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에 피었던 잔잔한 기운이 사그라들 즈음, 그녀가 품 안에서 갈색 유리병을 꺼내더니 탁자 위에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탁.

루시안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태연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라비엘리는 그가 속내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치 지금 생각난 것처럼 굴고 있지만 사실 조금도 잊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루시안이 다시 걸어오자 라비엘리가 입을 열었다.

“어제 탁자에 약을 두고 그냥 갔더군요.”

“당신이 많이 고단해 보여서.”

그는 다사롭게 웃더니 라비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겠다는 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하루도 거르면 안 된다면서요.”

라비엘리는 이번만큼은 그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가 펼친 판 위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것으로 주도권까지는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저 여유로운 얼굴에 균열쯤은 만들 수 있겠지 생각했다.

라비엘리는 탁자 위에 놓인 가죽신을 애써 외면하며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랬죠.”

루시안은 라비엘리를 향해 차분히 다가왔다.

“하지만 어쩌죠?”

제가 간밤에 다 쏟아버렸다는 걸 알면 루시안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라비엘리는 그가 얼굴을 구기면 얼마 전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게 좋아요.’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들으면 루시안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루시안의 여유로운 미간이 좁아 들면 늘 그가 제게 보였던 미소를 지어 줄 것이다.

입술을 어떻게 했더라, 눈을 평소보다 가늘게 떴던가 아니면 그대로였던가.

산과 병증이 당신 때문에 나을 수 있는 기회조차 잃었다고 하면 그는 절망할 것인가, 아니면 반길 것인가.

지독한 상상으로 라비엘리의 머릿속이 가득 찬 순간-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가 간밤에 전부 버렸어요.”

라비엘리가 턱 끝으로 갈색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근, 두근.

누가 시킨 일도 그렇다고 실수한 것이 아니다. 라비엘리는 치욕스러운 경험으로부터 달아나려 행동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아니, 전부 다 아니다.

루시안을 골려주기 위해 한 행동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화를 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을 마주하고 싶어서.

그때, 닫혀 있던 루시안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잘했어요.”

“네?”

“잘했다고요.”

루시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마치 잘 자라고 인사를 건네듯 가벼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태연한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라비엘리였다.

그녀는 이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잊고 단단하게 세웠던 두 눈썹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루시안은 조금 더 가까이 라비엘리에게 다가오며 속삭였다.

“잘했어요. 대체 언제 버리나 궁금했는데.”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처음보다 빨라진 호흡을 고르는 데 집중하였다.

그사이 루시안은 라비엘리에게 완전히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라비엘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리를 굽혔다. 상기된 뺨에 루시안의 향기가 짙게 밀려왔다.

“잘했다니. 그게 무슨.”

“싫어했잖아요. 하고 싶지 않았잖아. 수천 권의 의학 서적을 읽었지만 이렇게 멍청한 치료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라비엘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좋아요, 라비엘리. 이런 식으로 하나씩 벗어나면 돼.”

“…….”

“막상 해보니 어렵지 않죠?”

“당신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을 뜨자 사내의 말간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의 평온한 시선을 마주하자 갑자기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내가 이럴 줄 알았군요.”

“아뇨, 그저 바랐을 뿐.”

“이런 식으로 사람을 조종하면…….”

“조종한 적 없어. 병을 들고 쏟아버린 건 당신이잖아. 아닙니까?”

라비엘리는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루시안에게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라비엘리는 간밤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약을 쏟아버렸는지를 떠올렸다.

필사적으로 내면을 더듬자 요동치던 가슴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아야 한다고 했잖아요. 명령이라면서. 당신 아버지의 명령이잖아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가 천천히 올려 떴다.

“그랬죠.”

“그걸 빌미로 날 여기까지 데려왔으면서 이제 와서 벗어나라고요?”

라비엘리가 날 선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루시안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벗어나는 게 당신의 목적 아닙니까?”

“……무엇으로부터?”

“당신을 옭아매는 삶으로부터.”

더는 르휜가의 여인이 아닌 순간부터 라비엘리의 삶은 치욕과 우울뿐이었다.

벗어날 수 있으리란 희망도, 다시 행복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전부 사라졌다.

라비엘리는 저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문이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며 지독하게 홀로 살아남아서라고.

어딘가에 살아 있는 동생 때문이라는 말 역시 한심한 변명일 뿐일지 모른다. 죽지 못해 그저 숨을 쉬고 있으면서 여기를 벗어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다.

라비엘리는 제게 아무런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질긴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이어가는 것이 끔찍했다.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 솔직한 제 속내를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내겐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여유도 없어요.”

“있다면 할 겁니까?”

하지만 그와 대화를 계속한다면 어쩐지 가슴에 구멍이 뚫려 슬픔을 줄줄 흘려보낼 것만 같았다.

“말하고 싶은 게 뭐죠?”

라비엘리는 말꼬리가 떨리는 것을 가까스로 감추고는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적갈색 눈동자에 묘한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당신이 내 어머니가 되는 건 싫거든.”

그 말에는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탁,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라비엘리는 고개를 돌리고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그러자 루시안이 라비엘리의 턱 끝을 부드럽게 제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까?”

두 사람 사이에는 침울한 고요만이 느리게 흘렀다.

테아노는 언젠가 저를 후작 부인의 자리에 앉힐 것이다. 그가 무슨 속셈인지는 사실 뻔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살아갈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돌연 그의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라비엘리는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어차피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가 마이어가의 안주인이 되든, 후작 부인이 되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라비엘리는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 맞서고 있었다.

적수가 안 되는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벌써 잊었어요? 나는 그분의 아들이거든.”

“거짓말일지도 모르죠.”

“이런, 그사이 의심이 늘었군요.”

“아뇨, 후작께서 당신을 정말 아들로 인정할 것 같은가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은 아름다운 입술을 얄궂게 늘렸다.

“상관없어요.”

“뭐라고요?”

“그런 건 상관없다고요.”

“……당신.”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손을 옆으로 쳐내며 다시 물었다.

“대체 마이어가에는 왜 왔죠?”

“오호라, 이 질문 전에도 한 번 한 것 같은데. 맞나요?”

“그때도 대답은 안 했거든.”

그러더니 다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이어가의 외부인은 당신이야. 난 루시안 마이어거든.”

루시안은 잔뜩 굳은 라비엘리와는 대조적으로 빙글거리며 웃었다.

라비엘리는 격해지려는 감정을 꾹 누르며 낮게 물었다.

“대체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죠?”

“아직은 아냐.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귓가에 속삭이더니 허리를 세웠다.

“그만 쉬어요. 푹 자야 빨리 나을 테니.”

그는 라비엘리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한 여인을 눈 속에 담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라비엘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이 지나간 뒤에는 또 다른 침묵이 절망과 함께 밀려오며 넘쳐오는 밀물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노랗고 빨갛게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제 눈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피하지 않고 계속 응시하였다.

눈에 어린 그림자는 마치 라비엘리를 잡아먹으려는 듯 일렁였다. 그녀는 그것이 저를 그대로 삼키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번져가는 우울이 침대 위로, 탁자 아래로, 문가로, 창문 틈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러다 라비엘리의 침묵을 타고 그녀를 완전히 잡아먹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고 다시 끝없이 길고도 어두운 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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