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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53)화 (53/136)

53화

“아젤디노는 향이 좋아요. 말린 잎을 머리맡에 두고 자면 숙면에 도움이 될 겁니다.”

루시안은 능숙한 솜씨로 찻잎을 우려선 라비엘리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라비엘리가 차를 한 모금 넘긴 사이, 그가 제법 묵직해 보이는 상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별말 없이 라비엘리가 앉은 쪽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라비엘리가 찻잔을 든 채 눈만 두어 번 꿈뻑이자 루시안이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이게 뭔가요?”

어쩐지 상자를 열어보는 게 두려웠다. 대체 무엇이 들었을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춰봐요.”

루시안이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나른히 말했다.

“…….”

라비엘리는 제법 단단해 보이는 상자를 한 번, 그리고 저를 관찰하고 있는 루시안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걸 사 오느라 하루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꽤 값이 나가는 물건이거나 구하기 어려운 물건, 아니면 조심해야 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라비엘리가 고민만 할 뿐 섣불리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루시안이 다시 말했다.

“힌트 줄까요?”

그러고는 라비엘리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말했다.

“어디든 탈출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거예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탈출이라고요?”

“혹은 도망?”

그러고는 예의 두 입술을 길게 늘이며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느덧 익숙해진 그의 표정,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단순히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수수께끼 같은 음성을 남긴 채 루시안은 입을 닫았다. 그는 오래 걸리더라도 라비엘리의 대답을 기다릴 모양이었다.

‘어디든 탈출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거라고?’

설마.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절 위한 건가요?”

“네.”

그러고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두려운 단어를 떨어뜨렸다.

“설마…… 총이에요?”

“뭐라고요?”

루시안은 눈썹을 있는 대로 들어 올리더니 이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까지도 라비엘리는 제가 상자 속 물건을 단번에 맞춰서인지, 아니면 틀려서 웃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 엘리…… 당신은 정말이지.”

루시안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당신 총이 갖고 싶었어요?”

“탈출이나 도망치기 위해서 필요한 거라면서요.”

“탈출하는 데 꼭 필요한 게 총입니까? 와,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그는 면면에 아직 남아 있는 웃음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그만 놀리고 이제 말해줘요.”

루시안의 이런 대화법에는 이골이 났는지 라비엘리는 어딘가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상자를 라비엘리 쪽으로 스윽 밀더니 말했다.

“직접 열어봐요.”

“…….”

“총 아니니까 겁먹지 말고 열어봐요.”

속내를 빤히 들킨 것 같아, 그리고 그에게 또 당했다는 생각에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음성이 다 끝나기 전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얌전히 들어있는 건 다름 아닌 신발이었다.

“당신 신발이 못 쓰게 된 것 같아서. 새로 사 왔어요.”

“…….”

라비엘리는 차마 손을 뻗어 신발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저 강마른 시선으로 방 안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석류빛이 도는 가죽신이었는데 폭이 넓은 리본으로 장식한 꽃송이가 달려 있었다. 앞코는 적당히 둥글었고 마감이 야무진 것이 꽤 값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쩐지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총이 아니라 실망했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뭘 좋아할지 몰라서 추천을 받았는데, 별로입니까?”

피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라비엘리의 가죽신은 로제가 여러 번 세탁했지만 검붉은 자욱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라비엘리는 그것을 한쪽 구석에 세워두곤 로제가 빌려준 밀짚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천천히 신발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던 루시안이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신어봐요.”

라비엘리가 신발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자 루시안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워 앉더니 오른쪽 신발을 들어 라비엘리의 발에 신겨 주었다.

“아주 잘 맞네요.”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이래 봬도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서.”

“늘 그렇게 과신하나요?”

“아뇨, 확신이 있을 때만.”

루시안은 라비엘리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두 눈에 내려앉은 피로가 무색할 만큼 천진한 웃음이었다.

조금 더 오래 그 미소를 마주했다간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것만 같아 라비엘리는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고마워요. 신발을…… 사러 갔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사실 옷도 사 오고 싶었는데.”

루시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 라비엘리는 뒷말이 궁금해졌다.

“그랬는데요?”

“아닙니다.”

루시안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꽤 단호하게 대답했다.

“말해봐요, 그랬는데요?”

“뭐예요, 뭐가 궁금한 겁니까?”

“당신이 하려다가 그만둔 말.”

“…….”

루시안은 도로 의자에 앉더니 제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뜨거웠던 차는 어느새 먹기 좋은 온도로 식어 있었다.

“별 얘기 아니었어요.”

“그러니 해봐요.”

“듣고 나면 그렇게 조른 걸 후회하게 될 텐데.”

“후회 안 해요.”

그러자 루시안은 두 손을 한 번 들어 보이더니 아래로 털썩 떨구었다.

“신발까진 할만했는데 여자 옷은 사본 적이 없어서.”

그는 오른손으로 입매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가는 곳마다 여인들로 가득하더군요. 들어가지도 못하고 창문으로 기웃거리는데…… 도저히 혼자 들어가서 드레스를 고를 수가 있어야지.”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오늘 처음으로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지금 웃었어요?”

그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자 라비엘리는 반대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실소로 시작된 웃음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루시안은 황당하다는 얼굴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처럼 라비엘리가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 세상에.”

라비엘리는 조금 전 루시안이 그랬던 것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웃음이 잦아들고 난 후 라비엘리는 상기된 얼굴을 매만지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당신이 그런 것도 가리나요?”

“뭐라고요?”

“여자들이 많아서 못 들어갔다니 우습잖아요.”

“그게 왜?”

“그런 걸 신경 쓴다고 생각하니 정말 재밌네요.”

“와,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철면피 무뢰한인 줄 알아요?”

라비엘리는 웃음을 뚝 멈추고 그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러자 루시안은 억울한지 두 손을 쳐들고 펄펄 뛰었다.

“당신 사람 한참 잘못 봤어요.”

“그렇다고 하죠.”

“그렇다고 하다니! 난 완전 신사라고요. 바른 품행과 매너가 몸에 밴 신사. 레이디에게 온전한 신발을 신게 하려 종일 다닌 걸 보면 모르겠습니까?”

라비엘리는 이번에도 말없이 어깨만 한 번 으쓱거렸다.

“어쨌든 신발은 고마워요. 내 발목만 다 나으면 이걸 신고 여길 나갈 수 있겠네요.”

“네, 그러려면 푹 자는 게 좋을 겁니다.”

루시안은 라비엘리 앞에 놓인 차를 향해 한 번 손짓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요.”

라비엘리는 밖으로 나가려는 루시안을 불러세웠다.

그녀는 반듯하게 앉아 천천히 돌아서는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었다. 좀처럼 놀라지도 다급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으니 이번만큼은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하고 싶었다.

후작의 명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빌미로 저를 데려온 건 사실이니, 약을 없애는 게 가장 큰 일일 거라 생각했다.

만약 화를 낸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폭발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돌아선 루시안의 천연한 얼굴을 마주하자 어쩐지 품 안에 있는 갈색 병을 내밀 수 없었다.

고개를 슬그머니 떨어뜨리자 가죽신이 저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

라비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 꾹 붙이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녜요.”

루시안은 완전히 몸을 돌려서는 라비엘리를 마주하였다.

“뭔데요, 어디 불편합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손에 힘을 가득 주고 마른침을 삼킨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싶긴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냥 고마워서요.”

라비엘리는 잔뜩 굳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떨구었다. 그러자 루시안은 늦봄의 바람처럼 훈훈하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부드러운 눈웃음을 마주한 탓일까.

충동적인 생각 하나가 라비엘리의 등을 떠밀었다.

“루시안.”

“네.”

“……우리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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