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52)화 (52/136)

52화

먼저 2층으로 올라온 라비엘리는 문을 닫고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하지만 이내 파리해진 안색으로 로브를 벗어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두었다.

완전한 어둠 속, 초가 있는 방향을 한 번 힐긋거렸으나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이대로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싶어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곧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그를 피해 봐야 루시안의 놀림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라비엘리는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푸념 같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밖은 완전한 어둠이 내려와 있었고 이따금 들려오던 마차 소리나 사람들의 걸음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제게도 이대로 밤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멀리 묵직하고 낮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인가?’

이제 그가 들어오면 또다시 감정의 소모가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라비엘리는 그것을 피하고 싶은 동시에 온종일 그가 시내에서 찾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똑똑.

기다린 동시에 피하고 싶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엘리가 아무 대답 없이 이불을 꼭 쥐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루시안이 들어왔다.

그는 말 위에 있던 짐을 쥐고 올라왔는데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많이 안 기다렸죠?”

루시안은 들고 온 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램프 안에 있는 초에 불을 밝혔다.

방 안이 밝아지자 한복판에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어딘가 피로해 보이는 얼굴, 흐트러진 머리칼에 잠시 시선을 두었으나 이내 고개를 돌린다.

라비엘리는 벽을 쳐다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로제가 한 말 때문에 오해한 것 같은데 기다린 적 없어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틀고 있었다. 괜히 거짓말이니 코가 빨개졌느니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 머리를 돌린 것이 오히려 루시안에게는 재미있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요, 둘 다 기다릴 필요 뭐 있나.”

루시안은 태연히 대꾸하더니 들고 온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가 사 온 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으나 어디에 다녀온 것인지는 알고 싶었다.

온종일 어디에 가서 무얼 한 것일까.

“필요한 약초가 있어서 사러 갔다 왔어요.”

“무슨 약초요?”

“에몬 씨 창고에 없는 게 있어서. 심신을 안정시키고 불면증에 좋은 약재를 좀 구해왔어요.”

그는 잘 말린 약초를 꺼내 보이며 싱긋 웃어 보였다.

“…….”

라비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시안이 들고 있는 약초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하지 않는다면 저 풀이 어디에 쓰는 것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물론 루시안이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라비엘리는 그의 진심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옛날엔 구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꽤 흔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쪽에는 취급하는 곳이 없더군요.”

“무슨 풀인데요?”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아젤디노라고.”

다시 그가 들고 있는 마른 잎을 찬찬히 살피자 언젠가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떠올랐다는 사실에 기쁨도 잠시, 라비엘리는 어딘가 음울한 표정이 되었다.

아젤디노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우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은 그녀의 어머니가 즐겨 마시던 차였다.

라비엘리의 어머니는 불안이 높은 사람이었지만 백작은 그녀의 어머니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더는 세상에 없는 어머니가 좋아하던 차. 그것을 이 낯선 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마셔본 적 있어요?”

루시안의 질문에 라비엘리는 입술에 슬쩍 힘을 주었다.

뭐든 말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연히 입을 열었다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함부로 쏟아질까 봐서였다.

“네.”

“좋지 않은 추억이 있어요?”

루시안의 질문이 익숙한 풀냄새와 함께 날아왔다.

“아뇨, 어머니께서 자주 드셨어요.”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어머니에 관해 한두 마디라도 더 하길 바랐으나, 그녀는 입술을 꼭 닫은 채 시든 풀잎처럼 앉아 있었다.

“당신 롭에서 왔다고 했나요?”

테아노가 라비엘리의 후견인이 된 것을 보면,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롭은 더 이상 그녀의 안식처가 될 수 없으며 그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아마 슬프거나 몹시 아픈 것일 터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 생기 넘치고 미래가 있던 과거의 라비엘리를 마주하고 싶었다.

“네.”

라비엘리는 이번에도 짤막하게 대답했다.

루시안이 가져온 차가 향수를 불러온 게 확실했지만, 그와는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녀에 관해 더 알고 싶었다.

“당신의 그 금색 머리카락은 어머니를 닮았나요?”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라비엘리의 내면을 더듬기 시작했다.

“네.”

짤막하게 끝낼 수 있었지만 라비엘리는 대답을 하기까지 꽤 오래 호흡을 골라야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롭에서의 기억은 수면 아래로 완전히 묻어두고 잊었다.

의식적으로라도 꺼내지 않으려 노력했고 이따금 불쑥 떠오르려 할 때면 억지로 가라앉히려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런 이유로 루시안이 함부로 건드리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직은 태연한 얼굴로 그 시절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마셔볼 수 있을까요?”

라비엘리가 표정을 바꾸며 질문을 던졌다.

영민한 루시안이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네, 당신 어젯밤에도 잠을 설쳤습니까?”

그 말은 어딘가 라비엘리를 멈칫하게 했다.

루시안이 질문을 던진 순간, 간밤에 그가 한동안 저를 내려다보다 돌아간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그의 시선이 어딘가 편치 않았다. 라비엘리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자, 루시안은 약초를 들고 일어섰다.

“뜨거운 물을 좀 가져올게요. 물에 우려서 조금 마시고 자면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방을 빠져나가자 라비엘리는 다시 홀로 남았다.

루시안이 두고 간 짐 속에는 약초 말고도 다른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가 오기 전에 무엇이 들었는지 살피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물론 마음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