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루시안 마이어는 어디에 간 것일까.
로제 말로는 아침 일찍 나갔다고 했는데 온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차 마실 시간을 넘기고 지루한 오후를 다 보낼 때까지, 그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알레를 길들이려 인근을 돌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다 혹시 갈라테이아로 사냥을 갔나 싶기도 했다.
짐승을 사냥할 때 쓰는 장총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도 총이 있었으니까. 발목을 다친 저를 데리고서는 사냥을 가기 어려울 테니 어쩌면 혼자 사냥터로 향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해가 기울기 전에 돌아올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
라비엘리는 흘러내린 머리를 추어올렸다.
루시안과 함께 있으면 불편할 뿐이다. 그가 없는 오늘 하루를 얼마나 평온하게 보냈는가.
‘설마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린 건 아니겠지.’
그러다 돌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기별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바람처럼 찾아온 사내가 아닌가. 오늘도 그날처럼, 마치 그때처럼 갑자기 사라진대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상관없어. 여기서 돌아가는 일쯤이야 나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걸.’
제 복잡한 속내에 정당성을 주려 생각한 것들이 되레 라비엘리의 불안감만 높여주고 있었다.
진심을 외면하려 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해가 기울며 남긴 어슴푸레한 빛이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아름답다는 감상도 잠시, 그저 멍하니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어?”
멀리 말을 탄 사내의 실루엣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으로 팔걸이를 붙들고 몸을 세우려는데 멀리서 들리던 말발굽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지 않아도, 고개를 내밀지 않아도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루시안이었다.
라비엘리는 그가 저를 발견하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바람을 쐬러 나왔을 뿐인데 공연히 루시안이 허튼소리라도 할까 봐, 그가 보이지 않아 얼마간 불안했던 제 모습을 들킬까 봐 겁이 나서였다.
“라비엘리.”
하지만 손잡이를 막 비틀려던 순간, 루시안의 음성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놓은 라비엘리가 고개를 돌리자 루시안이 말 위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타고 한참을 달려온 탓인지 아니면 뜻밖에 라비엘리를 마주했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라비엘리는 부러 그를 외면하고는 말에게 다가갔다.
“알레, 어디 갔다 온 거니?”
보드랍고도 거친 털을 손가락으로 긁어주자 알레가 투루루 소리를 냈다.
그 사이 루시안이 가벼운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안녕, 레이디.”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말을 걸어온 순간, 온종일 그녀를 괴롭히던 불안이 농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를 기다린 건 아니었지만 돌아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난 건 사실이었다.
라비엘리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두 감정이 마구 부딪히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왜 나와 있어요.”
“……답답해서요.”
어쩐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워 라비엘리가 고개를 돌렸다.
“나 기다렸어요?”
“아뇨.”
“이번엔 잘 모르겠네. 추워서 코가 빨개진 건지 아니면 거짓말을 해서인지.”
루시안은 싱긋 웃더니 라비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가 두른 로브를 정돈해주었다.
“어디 보자, 추워서인가?”
“그만 들어갈게요.”
“발목은 좀 어때요. 계단을 내려온 걸 보니 괜찮아진 모양인데.”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 오후에 느꼈던 여유도, 들녘이 붉게 물들었다 어둠 속에 묻히는 아름다운 장면도, 바람에 두 뺨이 차게 식는 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를 살린 건 루시안 마이어였다.
진창에서 꺼낸 것도, 망가진 발목을 치료한 것도 전부 그였다.
“……괜찮아요.”
“한번 볼까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올라갈게요.”
“또 잊었어요? 나 의사예요.”
“…….”
“앉아봐요.”
그에게 밀려 얼떨결에 벤치에 앉고 말았다.
그러자 루시안은 한쪽 무릎을 굽혀 앉더니 라비엘리의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많이 좋아졌네.”
“…….”
“적당한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었어요. 계단은 걸을만했나요?”
“네.”
라비엘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안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라비엘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루시안은 손등으로 입매를 가리며 말했다.
“내가 핑곗거리 만들어줘서 고맙죠?”
“사람 놀리면 재밌나요?”
라비엘리는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일어섰다. 급하게 일어난 탓인지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문가로 걸어갔다.
“반가워서 한 농담인데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요.”
“…….”
“라비엘리.”
“…….”
“미안해요, 화 풀어요.”
라비엘리는 루시안을 돌아보지 않은 채 낮은 음조로 말했다.
“반갑다고요? 대체 뭐가요?”
“당신을 오랜만에 봐서.”
등 뒤에 서 있는 건 분명 루시안인데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얼핏 비에 젖은 것처럼 축축하고도 나른한 것이 라비엘리의 목 언저리를 감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온종일 시내에 있으면서 당신이 잘 있는지 걱정했거든.”
“…….”
“안전하게 있는지, 끼니는 거르지 않는지, 다친 곳은 좀 어떤지.”
“그렇게 걱정됐으면 어디에 가는지 말하고 가지 그랬어요?”
라비엘리가 비아냥거리자 루시안은 얕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요.”
이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라비엘리는 어쩐지 손에 힘을 줄 수 없었다.
무엇을 찾으러 간 건지, 어디에 간 것인지, 온종일 그녀 머릿속을 떠다니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때 루시안이 다시 말했다.
“당신 화가 났군요. 걱정했어요?”
“아뇨, 내가 왜 당신 걱정을 하죠?”
“앞으로는 말하고 갈게요. 그러니 그만 화 풀어요.”
“이봐요, 오해하지 말아요.”
라비엘리가 다소 날 선 말을 뱉은 뒤 돌아서자 루시안은 어딘가 음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발갛게 상기되었던 두 볼은 다시 차게 식어 있었지만, 어딘가 우수에 젖은 듯한 눈빛은 여전했다.
“라비엘리, 내가 뭘 찾으러 갔는지 안 물어볼 거예요?”
“물어보지 않아도 말할 거 아닌가요?”
“기다려봐요.”
그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더니 알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안장에 올려 둔 묵직한 짐을 내렸다.
라비엘리가 눈으로 그것을 훑는 사이, 굳게 닫혀 있던 여관 문이 열렸다.
“어머, 이아신스 부인.”
문을 열고 나온 건 로제였다. 로제는 바로 문 앞에 서 있는 라비엘리와 루시안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추워요, 부인. 몸도 좋지 않으신데 아직까지 나와 계셨어요? 전 진작 올라가신 줄 알았는데.”
“괜찮아요.”
“어머, 지금까지 밖에서 부군을 기다리셨군요. 세상에, 손이 너무 차가워요.”
로제는 라비엘리의 손을 붙들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어쩐지 오늘 부인께서 아침부터 영 기운이 없으시더라고요.”
로제의 말에 루시안이 라비엘리를 나른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라비엘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로제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랬어요.”
“식사도 잘 안 하시고.”
로제의 말에 루시안이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몰리. 그랬어요?”
“그냥 입맛이 없었을 뿐이에요.”
라비엘리는 로제가 그만 입을 다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좀처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발목을 다치신 게 아니면 같이 나가셨을 텐데. 그렇죠? 그나저나 두 분은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시는지.”
“로제, 이만 올라갈게요.”
라비엘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루시안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몰리.”
“…….”
“난 알레를 묶어두고 따라 올라갈게요.”
불편함을 들키지 않으려 입매를 다잡지만, 어쩐지 루시안은 어둠 속에서도 제 표정을 알아차릴 것 같았다.
“네, 그래요.”
“나의 사랑스러운 몰리, 이 정도는 기다릴 수 있죠?”
라비엘리는 마지막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여관으로 들어갔다.
코가 빨개졌다느니 부끄럽냐느니 하는 말이 저를 따라붙을까 봐서였다.
“어쩜, 저렇게 다정하실까.”
하지만 두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로제는 두 손을 꼭 모으고는 한동안 루시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