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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50)화 (50/136)

50화

“아.”

라비엘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로제는 무언가 생각난 듯 힘없이 어깨를 떨어뜨렸다.

“참, 부군께선 아침 일찍 나가셨죠.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요.”

“……네, 그랬군요.”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는 루시안이 보이지 않았다.

늘 식사가 올라올 시간에 맞춰 들어왔는데 아침 일찍 어디에 간 것일까.

라비엘리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자 로제가 손을 내저었다.

“부인, 제가 한 말은 잊으셔요. 정 안되면 사람을 부르면 되니까.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네, 그냥…… 정말 방해받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

라비엘리는 로제의 불안감을 덜어주려 가볍게 대꾸했다. 그녀의 말에 로제는 양팔을 붙들더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벌써 며칠째 식사조차 하지 않으니까요.”

“로제가 보지 못한 사이에 나왔다가 들어간 건 아닐까요?”

“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 1층을 비운 적이 거의 없는걸요.”

“이상하긴 하네요.”

“많이 이상해요. 설마…….”

로제는 문가를 한 번 의식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위에서 목을 매달았거나 손목을 그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네?”

로제의 말에 놀란 라비엘리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몸을 움츠렸다.

“그럴……리가요.”

“물론 아직 엘던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요.”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까 겁이 난 탓에 라비엘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외곽에 있는 여관에 와서 살인을 저지르거나 죽는 일이 왕왕 있다고 들었어요. 둘이 들어와서 한 명만 나간다거나 아예 나가지 않는다거나.”

“맙소사.”

로제는 손가락을 하나 들더니 천장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오, 부인. 설마 그런 건 아니겠죠?”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로제.”

“……말하다 보니 정말 무서워지는데 차라리 병사들을 부를까요?”

로제의 말에 라비엘리의 가슴의 철렁 내려앉았다.

숲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온 게 아니라 하더라도 다시 병사들이 들락거리는 건 꺼려졌다.

다시 그들의 눈에 띄고 싶지도, 그들의 음성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마주칠 일이 없을 테지만, 행여 물어볼 것이 있다며 들어오는 것도 문 너머로 목소리가 스며드는 것조차 끔찍했다.

이번에는 표정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워한다는 걸 들킬 것 같아서였다.

“부인?”

“아, 네. 그냥 추측일 뿐인데 병사를 부르는 건 지나친 것 같아요. 그들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런가요? 그럼 어쩌지요. 조금 더 기다려볼까요?”

로제의 말에 라비엘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이가 오면 얘기해볼게요.”

“정말요? 감사해요, 부인. 정말 친절하시네요. 두 분이 엘던에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누차 말씀드렸지만 여기서 일하는 건 정말 너무 고단하고 힘든 일의 연속이랍니다. 전 완전히 지쳐버렸어요!”

로제가 푸념하자 라비엘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옛날처럼 제가 백작가의 딸이었다면, 로제를 데리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라비엘리는 저와 함께 가지 않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에고, 너무 시간을 지체했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쉬세요.”

그사이 로제는 혼잣말처럼 빠르게 중얼거리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쾅.

그녀가 나가자 라비엘리는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식탁 위를 올려다보았다.

음식은 전부 보기 좋았으며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식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가 됐든 루시안에게는 부탁하고 싶지 않은데.’

괜한 말을 꺼낸 것일까.

하지만 병사들이 와서 여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겠지.

‘로제가 부탁한 거야. 나는 그저 말을 전달하는 것뿐이야.’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데 문득 간밤에 루시안이 남긴 말들이 떠올랐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게 좋아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루시안의 진득한 음성이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아 얼굴을 마구 문질러보지만, 되레 기억만 선명해질 뿐이었다.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돼.

라비엘리는 저를 따라붙은 잡념에서 벗어나려 앞에 놓인 음식에 집중해보았다.

포크를 집어 들고 고기를 툭툭, 건드려본다.

‘입맛 없다며 어리광부릴 생각하지 말고 먹어요.’

‘지금 먹어요. 식으면 더 먹기 힘들 테니까.’

‘먹어야 도망갈 힘이 생길 거 아닙니까.’

하지만 어쩐지 포크를 집었던 손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라비엘리는 포크를 다시 식탁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웃어요. 농담이었어요.’

‘…….’

‘농담에도 웃지를 않으니, 어떻게 해야 당신 기분이 좋아질까.’

저택에서 너무 멀리 나와 있는 탓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이 둘이나 죽는 걸 목격했고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으며, 하녀도 없이 태어나 처음 와 본 곳에 있지 않은가.

그것도 로튼의 외곽, 사냥터와 인접한 곳이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의지할 데라고는 후작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사내밖에 없으니 자꾸 생각나는 게 당연했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잔상을 지워 내려 얼굴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먼저 과일 조림을 푹 찍어 입에 넣은 뒤 오물거리자 달콤한 기운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사실 잠이 들기 전까지만 해도 루시안에게 텅 빈 갈색 병을 내보일 생각을 하며 묘한 쾌감에 젖어 있었다.

좀처럼 당황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사내였다. 늘 여유로운 입매로 상황과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도 표정 변화가 없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가 얼마나 작위적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빈 병을 건네받으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 아침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아침 일찍 어딜 간 걸까.

그런 생각 끝에 라비엘리는 다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지금은 어떤 것을 입에 넣어도 전부 돌을 씹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뭐든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루시안에게 대응을 하든 반항을 하든, 무엇이든 하기 위해선 먹고 기운을 차리는 편이 나을 테니까.

라비엘리는 다시 한번 과일 조림을 포크로 푹 찍어서는 입에 넣었다.

* * *

해가 넘어가고 저녁이 다 되어가도록 루시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로제는 식사를 챙겨주러 두 번 더 들어왔고 루시안의 행방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라비엘리가 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부군께선 아직이시죠?”

“네, 미안해요. 어제 특별히 들은 이야기는 없었는데.”

“할 수 없지요. 해가 졌으니 3층은 내일 올라가 봐야겠어요.”

“미안해요, 로제.”

“별말씀을요.”

로제가 돌아간 뒤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대 바로 아래 놓여 있는 슬리퍼를 찾아 신은 뒤 힘을 주자 생각보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걸을 수 있겠는데.’

라비엘리는 침대 난간을 붙잡고 일어섰다. 그런 뒤에는 식탁을, 그리고 벽면을 잡고 조심스레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발목에 힘이 온전히 실리지 않아 절뚝일 수밖에 없었지만, 라비엘리는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로제가 깨끗하게 빨아 돌려준 로브를 집어 들었다. 세탁한 뒤였지만 어쩐지 루시안의 향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길고 어두운 복도 끝에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잘 걸어 내려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보다 우선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자 방 안에서 늘 들었던 나무 뒤틀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삐걱, 삐걱.

제가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라비엘리는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마이어가의 저택에 있을 땐 늘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 끝에 후작이 들어오곤 했다.

그때의 기억이 학습된 탓일까. 라비엘리는 내내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리는 통에 호흡을 정돈하려 애를 써야만 했다.

“어머, 부인. 왜 나오셨어요?”

1층으로 내려가자 아침보다 수척한 얼굴의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책을 좀…… 할까 싶어서.”

“다리는요.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앞에 있는 벤치에 그냥 좀 앉아 있을게요.”

“그래요.”

로제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제 피로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지 그저 두어 번 고개만 끄덕였다.

단단한 문을 밀며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라비엘리는 로브를 앞으로 당기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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