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동그랗게 그녀를 감싼 이불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고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숨소리 역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규칙적이었으니까.
그러나 루시안은 입안에 머금은 소리를 삼켜냈다.
의식적으로 흘리는 듯한 고른 호흡……. 벽을 보고 완전히 웅크린 모습 때문이었다.
‘가여운 사람 같으니.’
루시안은 주머니 속에서 들고 온 갈색 약병을 꺼내 들었다. 손에 쥐고 천천히 굴리자 매일 밤 그녀를 어루만졌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테아노가 남긴 말을 가만히 떠올리다 다시 라비엘리가 누워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낙마 사고를 당한 날보다 오늘, 라비엘리는 더 힘들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위태로운 얼굴이지만 사실 그녀는 누구보다 강인한 여인이라는 걸 루시안은 알고 있었다.
루시안은 갈색 병을 도로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려다 말고 라비엘리가 누워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촛불을 끄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잘 자요.”
그는 속삭이듯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라비엘리의 방을 빠져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자 라비엘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에 눈이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기다린 뒤 몸을 일으킨다.
오늘은 왜 그냥 갔을까.
설마 잠이 든 거로 생각해서?
그러나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루시안이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나간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저 다행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궁금해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래 봐야 루시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가는 것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라비엘리의 시선이 갈색 병에 닿았다.
“…….”
여기에 저걸 두고 간 건 대체 무슨 뜻이지?
해야 할 일을 위해 방에 들어왔지만, 나를 깨우지 않고 돌아갔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발목을 슬쩍 돌려보자 미약한 통증이 느껴지긴 했으나 아예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고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한다. 테이블 앞에 선 라비엘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갈색 병을 손에 쥐었다. 매일 밤 저를 괴롭게 하는 것의 실체를 처음 마주한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매일 밤 사내의 손으로 발라야 효력을 발휘한다는 미지의 약- 라비엘리는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서 얼굴이 쪼글쪼글한 산파와, 점잖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누구보다 게걸스럽게 웃는 테아노와, 물흐르듯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를 차례대로 떠올렸다.
라비엘리는 무언가 결심한 듯 갈색 병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뚜껑을 비틀자 비릿한 동시에 생소한 냄새가 흐르기 시작했다.
“…….”
슬그머니 안을 들여다본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이런 걸 바른다고 해서 제 몸이 달라질 리 없지 않은가.
산파 헤레스는 저처럼 메마른 여인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신께서 제게 불행한 육체를 내리셨다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힐끔거리던 것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분명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라비엘리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목소리를 내는 건 허락되지 않았고 마치 남의 일처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날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감정이 요동치는 건 놀라운 변화긴 했다.
‘외람된 말이오나, 매일 밤 울며 각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라비엘리는 어금니에 힘을 잔뜩 주며 뚜껑을 도로 닫았다.
산파가 남긴 말을 지우려 눈을 세게 감았지만, 불쾌한 언어들은 검질기게 남아 라비엘리를 따라왔다.
마음의 문제다.
감정이 동하지 않아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고약이 들어간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산더미만큼 가져다 바른다고 해도 불감증은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백날 천날 약을 바른다고 해도 테아노 마이어가 끔찍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의 좌절과 고통만 날이 갈수록 진해질 뿐이다.
그러니 전부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라비엘리는 돌연 루시안의 여유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왜 갑자기.’
라비엘리는 그의 잔상을 지워 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 날엔 숨통을 틔워준 사람처럼 느껴지다가도 또 언제는 궁지에 몰아넣고 제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공범이라.’
라비엘리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다시 갈색 병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새벽녘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뚜껑을 돌렸다. 어쩐지 이번에는 비릿한 냄새도, 불쾌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당신이 당황하는 걸 보고 싶은데 어쩌지?”
라비엘리는 병을 창밖에 내밀고는 그대로 쏟아버렸다.
* * *
“부인, 몸은 좀 어떠세요?”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들고 온 로제가 다정하게 물었다.
따뜻한 수프와 양 허리 고기, 과일 조림, 사과 케이크 한 조각과 와인을 굳혀 만든 젤리까지- 아침에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차림이었다.
“아, 괜찮아요. 그런데 이게 다…….”
라비엘리가 음식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로제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었다.
“어젯밤에 제대로 식사를 못 하시길래 걱정이 되어서요. 잘 드셔야 빨리 낫지요.”
“고마워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내내 여관 안에서만 지내야 하니 이를 어째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로제.”
라비엘리는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다.
“별말씀을요. 얘기를 조금 더 하고 싶지만, 아침에는 워낙 바빠서.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고마워요, 로제.”
일하는 사람은 적은데 해야 할 일은 많은 탓에 그녀가 늘 정신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침 식사를 이렇게 챙겨왔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다소 과한 정찬에 먹기도 전에 목이 막히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로제는 인사 후 나가려다 말고 눈을 질끈 감더니 이마를 짚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은가요?”
“아뇨…… 원래 두통이 있었는데, 조금 심해졌어요. 며칠 전에 들어온 손님 때문에 너무 신경을 썼나 봐요.”
무슨 일인지 묻자 로제는 들고 나가려던 물그릇을 내려놓고 푸념을 시작했다. 이제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 않는 이상 한참 동안 이어질 거라는 걸 아는 라비엘리는 소리 나지 않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돈을 잔뜩 내고 일주일 묵는다길래 알겠다고 했지요. 식사는 문 앞에 두고 청소도 따로 필요 없다고 했답니다. 손이 갈 일 없으니 좋다고 생각했어요. 아아, 물론 부인은 아녜요. 제 말뜻이 뭔지 아시지요?”
“네, 알아요.”
“그런데 한 번도 보이지 않고, 식사를 문 앞에 두어도 손도 대지 않더라고요.”
“이상하네요.”
“영 찜찜해서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요. 뭔가 꺼림칙해요.”
“…….”
“강제로 문을 열어볼까도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이럴 때 에몬 씨가 있어야 하는데. 대체 내게 이 넓은 여관을 맡겨두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냔 말이에요!”
“로제, 진정해요.”
“정말 겁이 나서 그래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아이고, 머리야.”
로제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의 모습을 빤히 보던 라비엘리가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다.
“괜찮으면 내가 같이 가줄게요. 혼자 가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부인께서요?”
“네.”
“하지만.”
로제는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며 입술을 붙였다.
발목을 다쳐 겨우 걷는 여인이 함께 가준다고 해봐야 짐밖에 안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하지만 여자 둘이 가는 건.”
로제가 은근히 말을 돌리자 라비엘리는 그제야 제가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아.”
그때, 로제가 한쪽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부군께서 도와주신다면 좋을 것 같긴 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