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당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흐릿해진 라비엘리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루시안이 다시 의자 등받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제 나가달라는 말을 하려고 했습니까?”
“매사 그렇게 멋대로 굴면 재밌나요?”
라비엘리는 불쾌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게 사방을 막았다. 그러고는 멀리서 지켜보며 그의 불행을 즐기는 것이다.
“아니요.”
“늘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괴롭히면서 희열을 얻나요? 그런 식으로 굴면 좋은가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 당신은 꼭 그렇게 보여요.”
거기까지 말한 라비엘리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간 쌓인 감정의 응어리가 폭발하듯 새고 말았다. 하고 싶었던 말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머릿속이 욱신욱신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침묵이 흘렀다.
그 평화롭고 위험한 고요를 깨뜨린 건 루시안의 목소리였다.
“라비엘리.”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라비엘리는 고개를 돌리거나 대답을 하는 따위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창문 너머를 응시할 뿐.
“나는 당신이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게 좋아요.”
“…….”
습기를 베어먹은 듯한 음성으로 루시안이 말했다.
거짓말, 이번에도 진심이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게, 태연한 척하는 것보다 분노하는 게 좋아요.”
“…….”
“그게 훨씬 자유로워 보여.”
루시안은 찻잔을 내려놓더니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벗어나 느긋한 걸음걸이로 문가로 향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마루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였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텐데, 틈에서 피어난 소리가 라비엘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럼 쉬어요.”
문이 닫히고 라비엘리는 완전한 침묵 속에 놓였다.
창문 너머 이따금 들리던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루시안이 남긴 황망한 단어와 멀어지는 그의 걸음 소리만이 왕왕 울릴 뿐.
루시안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인 데다 며칠 동안 그가 보인 호의에 어느 정도 마음이 누그러진 건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제 발목이 다 나을 때까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다.
언젠가는 저택으로 돌아갈 테고, 테아노가 제 후견인인 이상 그의 아들이라는 이 사내와도 적당한 선에서 잘 지내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다.
어쩌면 후작과 묘하게 대치하고 있으니 제게 묘하게 도움이 될지도 몰랐고.
어리석고 순진한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들은 오롯이 가슴 속에 남아 라비엘리를 건드렸다.
감정을 숨기고 죽은 것처럼 살아온 시간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잊으려고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잔상과 뻔한 미래- 행복을 원하기보다 차라리 평범한 삶을 원하는 제 모습이 엇갈린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라비엘리는 주먹을 꼭 쥐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해도 루시안이 친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쾌한 응어리가 속에서 치밀었으나 라비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몸도 성치 않은 데다 가진 것도 없지 않은가.
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푼돈으로는 가까운 미래도 그려낼 수 없다.
그저 음울한 얼굴로 루시안이 나간 방문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 * *
그날 밤, 라비엘리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벽을 보고 돌아누워 있었다.
저녁에는 허기를 달래는 정도로만 수프를 넘긴 뒤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읽을 만한 거라곤 이런 것뿐이라며 로제가 가져다준 낡고 오래된 소설책도, 서부에서 가져왔다는 귀한 차도, 누가 언제 두고 갔는지도 모를 종이와 펜도…… 어느 것 하나 손대지 않았다.
라비엘리는 그저 공허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했는데, 오히려 그 불안을 직면하고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감정의 방향이 틀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포기에 가까운 마음일 것이다. 낯선 사내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에 닿자, 온몸에 두드러기처럼 심술과 분노가 돋아났다.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말해줄까요? 당신이 어떻게 할지 궁금했거든. 내게 동조할 것인지 아니면 사실을 털어놓을 것인지.’
‘뭐라고요?’
‘내 범죄를 숨겨줬으니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나와 공범입니다.’
불행하게도 라비엘리는 그날의 치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총을 쏜 사내에게서 공범이라는 말을 듣자 머릿속에 위태롭게 엉켜 있던 실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루시안 마이어는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아니, 그는 음험하고 이기적인 자다.
뒤틀린 심사를 감추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모르겠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얼마 후면 루시안이 들어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이 잠에 빠져들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잠은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고 있었다. 어둠과 고요가 뒤섞인 방, 사내가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은 자꾸만 몸을 움츠러들게 했고, 한기마저 스미는 것 같았다.
라비엘리가 이불을 어깨까지 당겼을 때였다.
멀리서 느릿하고도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곧 루시안이 들어오리라는 걸 깨달은 순간, 라비엘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슈미즈와 이불로 꼭꼭 숨긴 심장이 불안하게 박동하기 시작한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라비엘리는 반대로 눈을 꼭 감았다. 이대로 잠이 들어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다면.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조금 전 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제된 사내의 발걸음 소리가 시작되었다.
루시안이었다.
그는 어슴푸레한 빛 속을 헤치고 천천히 걸어서는, 먼저 테이블 위에 놓인 초에 불을 켰다.
어둠이 서서히 갈라지자, 루시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오늘 라비엘리의 하루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제가 나갔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풍경, 로제에게 부탁해 가져다주라고 한 낡은 책 역시 펼쳐본 흔적 없이 놓여 있었다.
루시안은 소리를 내지 않고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손에 들고 빠르게 훑어내자 묵은 종이 내음이 풍겨왔다.
그는 다시 책을 내려놓고는 이번에는 주전자와 찻잔을 살폈다. 뚜껑을 열자 다 식어버린 물은 가득 담겨 있었고, 찻잔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로제 말로는 라비엘리는 온종일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걷는 게 불편할까 싶어 저를 의지해 산책이라도 가자 했으나 그것도 싫다, 기력을 회복해야 할 것 같아 푸짐하게 상을 내놨지만 수프 몇 입 떠먹은 게 전부였다고.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크랜을 내밀자, 로제는 다시 온화한 얼굴이 되어서는 내일은 조금 더 신경을 쓰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세상에,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내 아내를 잘 돌봐준 게 고마워서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하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두 분 내외께서 제 수고와 노력을 알아주시니 정말 일할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오늘 혹시 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던가요?’
‘네, 다른 이야기요? 흠, 종일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질 않으신 것 같긴 한데.’
‘그렇군요.’
‘그래도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드렸답니다. 참, 급한 일은 잘 처리하고 오셨나요?’
‘네, 덕분에요.’
루시안은 고개를 돌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불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라비엘리의 호흡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잠이 든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걸어선 라비엘리가 누워 있는 침대맡으로 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촛불에서 멀어진 탓에 그녀의 실루엣은 흐릿해졌으나 향기는 보다 진해졌다.
“라…….”
루시안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