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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47)화 (47/136)

47화

“부인께서도 혹시 말을 타고 가는 사내들을 보셨습니까?”

“네, 봤어요.”

“부군께서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하셨는데.”

“…….”

“동의하십니까?”

라비엘리는 잔뜩 굳어져 있던 미간에 힘을 풀었다.

제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식으로 대답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병사의 말에 동의한다면 루시안의 증언은 꽤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저들이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 돌아가 다시 현장을 검증할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사건이 종결될 가능성이 컸다.

반대로 여기서 내가 루시안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럼 느긋하게 나를 바라보는 저 사내는 의심을 받게 될지 몰랐다. 더하여 내가 그에게 권총 한 자루가 있으며 실탄이 발사된 흔적이 있는지, 남은 탄환은 몇 개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증언한다면.

루시안은 이대로 병사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가 사라진다면 라비엘리는 그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가 있어 다행인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그로 인해 위태로운 제 삶이 위험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자인 데다 사기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원치 않는 행위를 밤마다 계속해야만 했고 갈라테이아까지 납치하듯 끌고 왔다.

여기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험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루시안의 이야기에 동조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지금의 상황을 후작에게 들킬까 봐 두려운 건 사실이었지만, 일말의 해방감을 느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루시안이 아니었다면 결코 느껴보지 못했을 자유- 비록 낙마로 끝나버렸던 그 순간의 쾌감은 여전히 라비엘리의 소맷자락과 목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양가감정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라비엘리가 이토록 과민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 따로 있었다.

처음보다 루시안과 가까워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부인?”

라비엘리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정한 라비엘리가 입술을 막 떼려던 찰나였다.

“오, 가여운 몰리……. 그녀는 억새풀이 흔들리는 걸 보고도 눈가가 촉촉해질 만큼 마음이 여려요. 그녀가 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전 내내 침울해 있었거든요.”

루시안이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측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러셨군요.”

병사는 짤막하게 대답하더니 루시안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래도 제 질문에 대답 정도는 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는 생각을 이어갈 시간도, 여유도 없다는 걸 깨달은 라비엘리가 두 손을 모으고 말문을 열었다.

“그이의 말이 전부 맞아요.”

“아, 그렇군요.”

라비엘리의 고민이 길었던 것이 무색하게 병사들은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얼마간 들고 온 수첩에 무언갈 끼적이는가 싶더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라비엘리와 루시안은 얼마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내들이 멀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을 때,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던 라비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미쳤어.”

루시안은 그녀의 말에 눈썹을 한쪽만 얄궂게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을 하나 뻗어선 저를 가리켰다.

“나 말입니까?”

“대체 왜 병사들을 부른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병사들은 이미 아침에 한차례 다녀갔으니 그저 잠자코 있었다면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굳이 로제를 찾아가 사냥터 인근에서 수상한 자들을 목격했다고 말하질 않나, 그들이 다투었다는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지를 않나, 왜 이런 위험을 자초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번 내가 로제에게 돈을 주었을 때는 그냥 넘어가는 게 낫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설프게 나섰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한 게 당신 아니었나요?”

라비엘리가 전에 없던 살찬 목소리를 내자, 루시안은 짐짓 당황한 척 몸을 뒤로 뺐다.

“워 워, 진정해요, 몰리. 당신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고요. 그렇게 흥분하는 건 좋지 않아요.”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라비엘리가 고개를 팩 돌렸을 때였다.

루시안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궁금해서.”

“…….”

“궁금해서 그랬어요.”

“뭐라고요?”

“병사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그는 서근서근하게 말하며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우수와 슬픔이 묘하게 뒤섞인 눈빛.

라비엘리는 그가 세상의 모든 감정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의 표정만큼은 정말이지 진짜라고 착각할 법하다고 생각했다.

“……확인이라니요?”

“말했잖아요. 나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그렇다고 병사들을 불러요? 만약 의심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요?”

“내가 그 정도도 생각 안 했을까 봐.”

루시안은 제 눈꼬리에 맺힌 거짓 눈물을 닦아내려는 듯 손등으로 슬쩍 건드리더니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은 정말 거짓말을 못 하더군.”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발끈하려다 말고 두 주먹만 꽉 움켜쥐었다.

“코가 빨갛게 변하는 게 너무 귀여웠어요.”

“……당신 정말.”

이제는 헛웃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래도 시간을 두고 보면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고민 끝에 결국 루시안의 말에 동조하기로 결심한 건, 그가 후작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만약 여기서 루시안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가 후작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녀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라비엘리의 머릿속이 만들어낸 가장 이상적인 변명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라비엘리는 조금 전의 제 모습을 후회하고 있었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병사에게 루시안을 가리키며 이 사내가 범인이라고 소리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라비엘리.”

“…….”

“내가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변하는지는 알아냈습니까?”

그가 다시 은근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라비엘리는 완전히 몸을 틀어선 루시안이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런, 나와는 다시 말하지 않을 작정인가요?”

“…….”

“이것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루시안이 어딘가 씁쓸한 음성을 테이블 위에 떨구었을 때, 라비엘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갈색 머리와 적갈색 눈동자에 시선이 닿자-

“알고 싶지도 않고, 앞으로도 몰랐으면 좋겠군요.”

라비엘리는 최대한 서늘하게 대꾸하였다.

그녀의 대답에 루시안이 어깨를 한 번 들썩였을 때였다.

똑똑.

다시 문가에서 들려온 소리에 라비엘리는 화들짝 놀라서는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날 뻔하였다.

그사이 루시안이 침착한 얼굴로 대답하자,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여인의 면면이 드러났다.

“부인, 좀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을 것 같아 차를 좀 가져왔어요.”

로제는 종종걸음으로 들어와서는 테이블 위에 차를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로제.”

“별말씀을요.”

“저는 괜찮아요. 마침 따뜻한 차가 생각났는데 정말 친절하군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는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차를 준비해주었다.

주전자의 작은 구멍으로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사이, 로제가 문을 열고 나갔다.

누군가 들어왔다 나가며 공기가 어느 정도 환기된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만히 앉아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흐릿하던 분위기를 먼저 깨뜨린 건 루시안이었다.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말해줄까요?”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던 라비엘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고?

루시안은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는지, 아니면 라비엘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지켜보는 게 즐거운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이 어떻게 할지 궁금했거든. 내게 동조할 것인지 아니면 사실을 털어놓을 것인지.”

“뭐라고요?”

“내 범죄를 숨겨줬으니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나와 공범입니다.”

루시안은 그렇게 속삭이더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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