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46)화 (46/136)

46화

길고 어둑한 복도를 걸으며 클라인은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외면하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새털처럼 가볍던 걸음에 투박한 사내의 구두 소리가 섞이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레브리안과 에몬이 멀어질수록 소리는 잦아들고 있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채 클라인의 귓가에 남아 맴돌았다.

그는 평소보다 빠르게 앞으로 걸어나갔으나 불쾌한 소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클라인은 레브리안의 다음 목적지가 궁금했다. 분명 창고를 정리한 뒤 남은 물건을 박스에 넣었을 터다.

아니면 청소 도구를 모아 놓은 것일까?

뭐가 됐든 지금 에몬이 그녀의 짐을 대신 들어주고 있다.

그 꼴을 막지 못하고 방관한 것이, 게다가 두 사람을 같은 방향으로 가게 두고 본 것이, 그 경박한 사내가 함부로 레브리안의 허리를 감는 걸 보고도 모른척한 것이 사무치게 후회스러웠다.

레브리안은 분명 저를 보고 있었는데.

무슨 말이든 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멍청한 새끼, 한심한 새끼.’

클라인은 똑똑히 보았다. 에몬에게 이끌려 돌아선 레브리안의 표정을.

저를 구원해달라고, 나를 어떻게든 해달라는 말이 분명했을 테지만-

도저히 레브리안의 손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각인처럼 박힌 탓일까.

레브리안을 향한 나의 마음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제 마음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았다.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순간, 완전히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였다.

외면하는 것이 저를 살리고 그녀 역시 구한다는 걸 레브리안은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신관님.”

지나는 동안 마주친 사제들의 인사는 귀에 들어올 겨를도 없었다. 클라인은 어딘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한참을 걸어 도착한 신전 본관. 클라인은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을 찾아 들어갔다.

대신관 하비네스 크리엘의 집무실이었다.

그는 손등으로 문을 두드리려다 말고 잠시 망설였다.

‘늦지 않았을까.’

클라인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신의 뜻을 전하는 일이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했다. 의심한 적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미 늦었겠지.’

처음으로 제가 입고 있는 사제복을 벗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것만 아니라면 당장 레브리안의 손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주먹을 세게 쥐어도, 눈을 감아도, 제 발걸음 소리에 집중해도 조금 전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선명해졌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더는 사제로 살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

그저 평범한 사내로 돌아가 신께서 내리신 신성력을 귀하게 쓰겠노라는 다짐이면 된다.

이 한마디면 될 터인데.

긴 호흡으로 복잡한 속을 달랜 클라인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한편, 같은 시각 집무실에 앉아 있던 대신관 하비네스 크리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두루마리 속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로군.’

벌써 비슷한 내용만 서너 개가 올라오고 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신탁을 청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신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것인가. 그래, 20년이면 그리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

하비네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보였다.

본래의 머리 색은 보이지 않을 만큼 백발이 성성했으나 눈빛만큼은 청년의 예리함을 잃지 않았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신관의 자리를 지켜온 그는, 뮬에서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이기도 했다.

“흠…….”

그는 원칙주의자였으며 스스로에게 몹시 엄격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늘 여유로운 교황과 사사건건 부딪쳐왔다.

하나 아직 그의 신력을 따를 자가 없는 데다 신전에서의 신망이 워낙 두터운 탓에 교황이나 황제도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하비네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두루마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단정한 사제복을 입은 클라인이 들어왔다.

“대신관님.”

클라인의 인사를 대충 받아낸 하비네스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게.”

“네.”

하비네스는 온화하지만 예리한 눈초리로 그를 살폈다.

이 젊은 신관은 저와 버금갈 만큼 높은 신성력을 가진 데다 입이 무겁고 올곧은 인물이었다. 아마 이대로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수석 사제가 될 것이다.

‘흠.’

근래 클라인의 안색이 어지럽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창백한 것을 넘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비네스는 신전 이곳저곳에 떠도는 소문을 들어 레브리안의 사정 역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클라인이 작고 여린 소녀를 보살핀다는 것도, 그의 어두운 낯빛이 소녀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말이다.

“태후 전하의 병세는 좀 어떠신가.”

“차도가 없어 후작께서 새로운 약재를 준비 중이라 하셨습니다.”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한 하비네스가 클라인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예?”

“자네는 어떤가”

뜻밖의 질문에 클라인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슬쩍 숙이며 말했다.

“루미온 님의 은혜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클라인의 대답에 하비네스는 냉소적으로 한 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옆에 쌓여 있던 두루마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신관의 속사정도 궁금하긴 했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 위급한 사안이 있었다.

“서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나.”

하비네스는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땅이 마르고 작물이 새카맣게 죽어간다.”

서쪽 일대의 수도원에서 올라온 보고는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작물이 죽고 비가 내린 직후에도 땅이 메마른다는 것이다.

“악마입니까?”

클라인의 말에 하비네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루미온 님의 기념일에 맞추어 요망한 짓을 하려는 것일 테지. 일단 수도원에서 가까스로 인근을 정화하고 있지만, 손이 부족한 모양이다.”

이대로 악마의 기운이 퍼진다면 대규모 역병이 돌지도 모른다. 클라인은 엄중한 사안에 자세를 바로 하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흠.”

하비네스가 클라인을 부른 건 이 일을 상의하기 위함이긴 했으나, 그를 보내도 좋을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하비네스 다음으로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다. 아마 서쪽으로 보내면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역병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면 저나 클라인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비네스는 클라인을 보내선 안 될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늙은이의 몹쓸 감인가.’

하비네스는 두루마리를 접어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혼자서는 무리네.”

“함께 갈 사제들을 모아 오늘 저녁에 출발하겠습니다.”

하비네스는 클라인의 면면을 살피며 흘러가듯 말했다.

“잡일을 도맡고 심부름을 할 아이도 하나 데려가게.”

“네, 대신관님.”

불행이 더 퍼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 악마가 이대로 힘을 키워 역병으로 번진다면 큰일이었다. 클라인이 서쪽으로 함께 갈 사제들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추리고 있을 때였다.

“모리벵으로 들어가려면 갈라테이아를 지나가야 하네.”

“그곳은 사냥터가 아닙니까?”

“신께선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내 예상으로는 그곳의 기운이 좋지 않네. 혹시 모르니 수상한 기운은 없는지 각별히 살피고 조심하게.”

“네, 대신관님.”

클라인은 정중히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