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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45)화 (45/136)

45화

“레비, 손바닥은 좀 괜찮아요?”

에몬은 레브리안의 표정을 살피며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네.”

레브리안은 건조하게 대답하고는 도로 입술을 꾹 붙였다.

중요한 건 제 손바닥도, 무거운 상자도 아니었다.

“이 상자만 가져다 두고 제가 약을 가져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레비.”

“저기.”

레브리안은 걸음을 느릿하게 하더니 제 허리를 감쌌던 에몬의 손을 치워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해요.”

그녀의 말에 에몬은 잠시 멈칫했다. 순간 턱 근육이 실룩거렸으나 곧바로 긴장을 풀었다.

“아, 그리 좋아하는 애칭이 아니군요. 미안해요, 몰랐어요.”

에몬은 남은 손을 마구 휘적거리며 레브리안에게 사과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여인에게 휘둘리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손을 올렸을 것 같았으나 꾹꾹 눌러 참는다.

아직 제 것이 되기 전이니 최대한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잡부 주제에 제법 얼굴이 반반하다 이건가?’

사실 에몬은 레브리안의 태도도, 그녀의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처럼 돈 많은 사내가 결혼하자 청하면 기뻐하며 당장 매달려야 정상이 아닌가.

심지어 구제 불능 아비의 빚까지 다 갚아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구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아비인 헤르젠 루즐은 아마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매질을 당하거나, 그러다 죽거나 아니면 멀리 노예로 팔려 갈지도 몰랐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끌려가 평생 죽도록 일을 해도 갚지 못할 만큼의 도박 빚이 아닌가.

저만 내게 오면 전부 다 갚아준다는데 무슨 생각으로 버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건, 혼자 가만히 있을 때는 술술 나올 만큼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것이, 정작 레브리안을 마주하고 나면 하얗게 변해 사그라드는 것이었다.

레브리안 루즐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었다.

사내의 분노를 잠재우고, 쌓아두었던 것을 전부 허물게 하고, 가진 것은 모두 내어주고 싶을 만큼 완벽한 젊음.

그녀의 아름다움만 제가 차지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혼자 잠들던 넓은 침대에 백금발 여인을 눕히고 제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에 그저 닿기만 해도 에몬 질은 웃음이 새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약은 괜찮아요. 그러고 있다 들키면 농땡이를 부린다고 혼이 날 거예요.”

“아니 농땡이라니. 다쳤잖아요!”

에몬은 과장된 목소리를 내었지만, 레브리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다니. 아녜요. 이렇게 고운 손에 생채기라니 용납할 수 없다고요.”

에몬은 연신 과장된 음성을 내고 있었다. 그것이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레브리안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한쪽 어깨를 움츠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정원에 도착했다. 레브리안은 에몬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은 뒤 바닥에 내려놓으며 허리를 굽혔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또 할 일 있어요? 아, 지금은 로튼에 가야 하죠, 참.”

그렇게 불쑥 내뱉은 뒤, 에몬은 머쓱한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레브리안은 저도 모르게 다소 체념한 마음으로 에몬의 장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순박한 사람 같아 보였다.

‘여러 번 마주치고 친해지면…… 조금 다르게 보이려나.’

레브리안은 애를 쓰고 있었다.

어차피 제게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 문득 루스가 제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런 것만으로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단다. 대화는 얼마나 해봤니? 그 사람은 무얼 좋아하는지 너는 무얼 좋아하는지는 이야기를 나눠보았니?’

내내 에몬이 건넨 말에 대답만 하던 레브리안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에몬 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뭔가요?”

그녀의 질문이 반가워 에몬은 반색하며 대답했다.

“저는 가리는 것 없이 다 좋아합니다. 당신이 먹다 남긴 것도 싹싹 잘 먹을 수 있지요.”

에몬의 대답에 레브리안은 눈을 찡그렸으나, 정작 그는 보지 못했다.

“아, 하지만 역시 어린 양의 뒷다릿살이 맛있지요. 다 큰 건 질겨서 맛이 덜해요. 어린 것이 부들부들하고 야들야들해서 맛이 좋지요.”

“……네.”

어쩐지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레브리안은 어딘가 체념한 얼굴을 하고 가까스로 질문을 한 가지 더했다.

“오늘 로튼에 돌아가시나요?”

“아, 그게 말입니다. 사실 저는 당신 대답을 기다린 다음에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신관님께서 부탁하시는 바람에.”

“부탁이요?”

“아까 마주쳤던 신관님이 조만간 빈곤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약재를 나눠주실 생각이신가 봐요. 정말 좋은 분이시죠. 훌륭해요.”

“아…….”

“약초에 관해선 저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신관님도 아신 거죠. 마을 사람들에게 배포해야 하니 양도 많고요. 로튼으로 돌아가서 가진 걸 전부 취합하고 새로 물건도 구해야 하고요.”

레브리안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 문제로 신관님께서 에몬 씨를 미리 만나신 거구나.

혹시나 했는데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자 입맛이 쓰다.

“아까 제가 로튼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바로 조금 전에 마주친 신관님의 부탁 때문이었어요. 어때요, 레브리안. 나랑 같이 로튼에 한 번…… 가볼래요?”

레브리안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를 따라간다는 건 그의 제안을 거의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제게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걸 알지만 에몬과 결혼하는 제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로튼에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아, 그렇죠.”

에몬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두 눈은 몹시 서늘하였다.

“저, 레브리안.”

에몬의 투박한 음성이 다시 그녀를 건드렸다.

“네.”

“신관님……과는 잘 아는 사이입니까?”

에몬은 그렇게 묻고도 제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천지 신관과 가까이 지내는 잡부는 없다. 게다가 상대는 이온 가문의 장자이자 장차 교황의 자리까지 오를 것이라고들 말하는 앞날이 창창한 신관.

“그냥 제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분이시라서요.”

레브리안은 고민 끝에 짤막하게 대답했다.

잘 안다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했고, 모른다는 거짓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그럼 레비…… 아니, 레브리안은 어렸을 때부터 신전에서 일했습니까?”

“네.”

“오, 이런. 정말 힘들었겠군요.”

에몬은 적당히 위로의 말을 건네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볼수록 귀한 외모 탓에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잡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레브리안을 데려다가 잘 씻기고 좋은 옷을 입혀두면 꽤 근사할 텐데. 그녀를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우러러볼까.’

한시라도 빨리 레브리안의 대답을 듣고 싶었으나, 대화를 나눠보며 느낀 건 그녀는 결코 서둘러선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생각보다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야. 괜히 서둘렀다간 아예 달아나버릴 수도 있으니 지금처럼 여지라도 두었을 때 잘해야겠어.’

“그래요, 레브리안.”

에몬은 목소리를 바꾸며 제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요. 로튼에 가서 한…… 사나흘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네.”

“잘 있어요.”

“네, 에몬 씨도요.”

에몬은 돌아선 뒤에도 두어 번이나 다시 몸을 돌려 레브리안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레브리안은 결코 그 호의가 반갑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돌아선 에몬은 복도를 걸으며 코를 거칠게 손등으로 문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레브리안과 클라인의 사이가 수상쩍다.

그래, 매일같이 마주하면 정이 들 법도 하지, 게다가 조각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곱상한 얼굴의 사내라면 더더욱.

하지만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에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건 사실 따로 있었다.

‘진짜 금발 머리가 아니면 어쩌지?’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만약 저 머리가 가짜라면?

그래서 나를 감쪽같이 속인 것이라면?

가짜에게는 저택도, 황금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레브리안의 아버지가 떠올랐으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 한심한 자식에겐 물어봐야 소용없을 테고.’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에몬이 볼을 긁적였다.

“로튼에 돌아가는 즉시 사람을 써서 알아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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