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레브리안은 에몬에게 붙들려 있던 손을 다급히 뺐다. 손끝에 남은 기운을 몰아내려 치맛자락에 두어 번 문질러 닦아보지만, 낯선 기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당혹스러움을 애써 밀어냈으나 어쩐지 클라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금기를 어긴 것처럼 가슴이 불쾌하게 뛰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눈동자만 위로 굴려 클라인을 올려다보았다.
클라인의 시선은 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아, 세상에- 신전은 굉장히 넓은 줄 알았는데. 여기서 신관님을 다시 만나다니요.”
그사이 에몬 질이 먼저 호방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모래처럼 빠져나간 레브리안의 손이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대답을 들은 뒤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신관님, 이쪽이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여인이랍니다.”
그는 굵직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뺨을 붉히며 말했다.
지체 높은 신관이 청소 따위를 하는 잡부를 알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여관부터 약재상까지 다양한 사업을 하며 사람을 부리고 있으나 잡부를 관리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니까.
“에몬 씨께서 말씀하셨던 여인이 레비였군요.”
클라인의 말에 에몬의 얼굴에 떠 있던 홍조가 천천히 식었다.
“……레비, 아…… 그렇죠, 네. 레브리안을 알고 계셨습니까?”
에몬의 질문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관이 잡부를 알고 있는 것, 아니 그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이 의아했으며 더불어 애칭으로 부르는 것 역시 묘하게 들려왔다.
‘레비? 레비라고……?’
설마 내 앞에서 일부러 애칭을 부른 것인가.
불쑥 떠오른 생각 하나가 에몬을 건드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신의 대리인 아닌가.
클라인을 힐긋거렸으나 그는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건조한 면면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레브리안은 아니었다.
지금껏 늘 저를 레비라고 불러주길 바랐으나, 클라인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이제 와 애칭을 불러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신관님께서 지금 이런 상황에서 애칭을 불러주신 거…… 제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는 건가요?’
저도 모르게 불쑥 이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손바닥이 까진 것도 잊고 손아귀에 힘만 가득 쥘 뿐이다.
그사이 클라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에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레브리안 쪽을 살폈다.
담담한 목소리를 낸 클라인과는 다르게 레브리안은 흔들리고 있었다.
눈처럼 흰 피부는 그 아래 혈액이 도는 게 느껴질 만큼 상기되었으며 푸른색 눈동자 안에 차오른 건 무수한 갈등과 번민이 분명했다.
‘뭐지?’
에몬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신관은 어떨지 몰라도 레브리안은 눈앞에 선 사내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레브리안을 알고 계신다고 하니 앞으로 신관님의 일을 더 열심히 도와야겠군요. 신관님, 제가 없는 동안 레브리안 좀 설득해주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레비의 대답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거든요.”
에몬은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레브리안의 얼굴은 처음보다 더 굳어지고 있었다.
‘그만, 제발 그만해.’
레브리안은 이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클라인은 그저 서 있을 뿐 별다른 표정도,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지?
그러다 문득 클라인이 테아노 후작에게 에몬에 관해 알아보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벌써 에몬 씨와 대화를 나눠보신 걸까.’
레브리안은 도저히 클라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행복을 위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정말 그게 전부인 걸까.
에몬에 관해 알아봐 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레브리안은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는 제 모습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아픈 만큼 외면하고 싶었다.
이 잔인한 감정을 더는 견딜 수 없는 탓에, 레브리안은 에몬이 들고 있던 상자를 빼앗듯 끌어당겼다.
이대로 계속 서 있다간 불경한 제 입술이 무슨 말을 꺼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빨리 가봐야 해서요. 그럼 저는 이만…….”
레브리안은 차마 클라인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발끝만 보며 중얼거렸다.
평소답지 않은 목소리에 가슴이 무너질 듯 위태로움을 느낀 건 클라인이었다.
처음 그녀를 마주쳤을 때는 잘 견뎠는데.
어쩐지 지금 돌아서는 레브리안을 마주하자 클라인은 차오르는 우울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아서.
“아이, 레비. 이리 줘요. 내가 옮겨준다고 했잖아요.”
“괜찮…….”
“안 돼요. 당신 손을 다쳤잖아. 그 고운 손에 생채기가 났는데 이렇게 무거운 걸 들게 할 수는 없지. 자, 이리 줘요.”
에몬은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레브리안이 들고 있던 상자를 가져갔다.
“하지만.”
에몬은 레브리안의 말을 탁 가로채더니 클라인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신관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이것만 옮겨주고 곧바로 로튼으로 갈 테니 염려 마시고요.”
“네, 그러시죠.”
“말씀드린 것처럼 사흘 안에 모든 약재를 가져오겠습니다.”
“네.”
클라인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 클라인의 발목을 붙든 건 에몬의 느릿하고도 선득한 음성이었다.
“참, 신관님.”
클라인이 돌아서자, 에몬과 레브리안은 나란히 서서 클라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향이 달랐을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걸 보는 건 몹시 괴로웠다.
본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성정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몬은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사내의 얼굴이 얼마나 지독하게 보일 수 있는지를 경험했을 테니까.
“신관님께서 보시기에 저희 어떻습니까? 제법 잘 어울리나요?”
에몬은 한 손으로 상자를 받쳐 들고는 남은 손으로 레브리안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레브리안은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온몸에 독처럼 퍼진 불쾌함, 벗어나려 했으나 그럴수록 에몬은 제 허리를 더 강하게 붙들 뿐이었다.
당황한 건 클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마터면 지금껏 유지해왔던 평정을 잃고 그대로 달려나갈 뻔했다.
아마 그랬다면 에몬의 손을 쳐내고 레브리안을 챙겼을 것이다.
사실 클라인은 조금 전 에몬이 한 말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웠다. 레브리안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모습이 진심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만약 결혼 후에도 저렇게 자상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이라는 생각까지 했는데.
레브리안의 마음은 묻지도 않고 경박하게 구는 꼴을 보니, 사무실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연기처럼 피어났다.
‘오직 백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어야만 했죠. 신관님 앞에서 이런 말씀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사실 저는 얼굴도 상관없었어요. 그런데 얼굴까지 아름다우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지요. 아마 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는 신께서 내리신 게 아니실까 해요.’
‘부끄럽게도 여기서 일하는 잡부랍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백금발에 피부가 희고 입술이 붉은 여자면 창부라도 상관없었거든요.’
그래, 에몬 질은 좋은 사내가 아니다.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제 모습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전부 수면 아래로 묻어두고, 지금은 에몬의 질문에 대답할 차례였다.
“네, 그렇습니다.”
클라인의 대답에 에몬은 잇몸까지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오, 세상에. 레비, 들었지요? 신의 대리인께서 우리가 잘 어울린다고 하셨다고요!”
그러나 정작 레브리안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정적 속에 묻혀버린 듯, 눈을 깜빡일 수도 호흡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그저 클라인이 떨어뜨린 말만이 느릿하게 한 번 더 반복되었다. 귓전에 잔해처럼 남은 말이 레브리안을 집어삼킨다.
알고 싶었고 궁금했던 젊은 신관의 마음을 전부 알아버린 것만 같아서.
짧고도 강력한 말이 마치 그간의 의문을 전부 해소해준 것만 같아서.
레브리안은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꼭 붙였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겨우 이런 식으로만 대답을 내려놓은 레브리안은 그대로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 제 허리를 감쌌던 불쾌한 감각 역시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에몬은 레브리안의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궁둥이를 흔들며 점점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