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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43)화 (43/136)

43화

“레비, 다 했으면 이것 좀 정원에 가져다 놔.”

“네!”

“먼저 나갈 테니 마무리 좀 부탁해.”

“네, 알겠어요.”

활기차게 대답은 했지만 옮겨야 할 짐은 제법 크고 무거워 보였다. 제사에 쓸 장막과 밧줄을 한꺼번에 넣어둔 박스였는데 제대로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레브리안은 군말 없이 쪼그리고 앉아선 상자 밖으로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밧줄을 밀어 넣었다. 짚을 엮어 단단하게 만든 밧줄은 꽉 쥐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얼얼했다.

“아.”

그러다 그만 거친 밧줄에 여린 손바닥이 살짝 쓸렸다.

붉은 핏방울이 희미하게 배어 나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쥔다.

크게 다친 것도, 통증이 심한 것도 아니었으나 자잘하게 남은 아픔이 레브리안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필이면 손바닥을 다쳐선.”

레브리안은 손에 감을만한 것을 찾으려다 말고, 씩씩하게 치맛자락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피부에 스며든 미약한 통증이 클라인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뭐야, 바보같이.”

레브리안은 자잘하게 남은 잔상을 지워내려는 듯 억지로 주먹을 쥐었다. 힘을 가하자 흐릿했던 아픔이 진해졌으나 레브리안은 주먹을 풀지 않았다.

어쩐지 이대로 손을 펼치면, 그에 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결혼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사제실에서 나온 뒤, 그와의 대화를 온종일 되새긴 탓에 글로 줄줄 적을 수 있을 만큼 생생하였다.

그러나 클라인이 남긴 말 중 레브리안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전부 나를 위해 해주신 말씀이야. 지금껏 은혜를 베풀어주신 걸 감사히 여겨야 해.’

레브리안은 알고 있었다. 저를 향한 클라인의 애정과 배려가 남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사제실로 따로 불러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고, 미래를 염려했다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분에 넘치게 감사한 일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저를 걱정해주고 위하는 것이 분명한데, 레브리안은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클라인은 그녀에게 울타리였고, 길을 제시하는 선지자였으며 방향을 잡아주는 빛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저를 여전히 걱정하고 인도하고자 하니, 당연히 기뻐야 마땅한 일인데.

‘에몬 씨에 대해 알아봐 주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는 거야? 바쁘신 분께서 하녀의 일에 이토록 신경을 써주고 계시는데.’

제게 일어난 일을 천천히 반추할수록, 레브리안의 마음을 묘하게 정리되고 있었다.

고작 신전에서 잡일을 하는 하녀에게 어쩌면 에몬의 제안은 천금 같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불가능한 애정에 매달려 현실을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 전부 알고 있는데.

‘레비, 넌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감히 기대라는 말조차 꺼낼 수 있단 말인가.

레비, 신께서 이런 불순한 마음을 알아차리신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레브리안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손바닥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 이미 가슴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이겨내려는 듯 곧장 두툼한 밧줄을 상자 안에 욱여넣었다.

그러고는 다부지게 상자를 들고 일어섰을 때였다.

투박한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키가 크고 건장한 사내가 창고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뜻밖에도 모습을 드러낸 건 에몬 질이었다.

“아, 여기 있었네요.”

레브리안은 갑작스러운 에몬의 등장에 제가 들고 있는 상자의 무게마저 잊고 말았다. 어색하게 인사를 꾸벅하자 에몬이 뒷머리를 긁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여긴 어떻게.”

당황한 레브리안이 겨우 한마디를 떨구자 에몬이 그녀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그게…… 일 때문에 신전에 왔다가 생각이 나서 들렀습니다.”

그는 넉살 좋게 흥정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한쪽 입꼬리가 연신 씰룩였는데 그마저도 숨길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네, 그러셨군요.”

레브리안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대답만 했다.

그때 레브리안이 들고 있던 상자를 가리키며 에몬이 물었다.

“이리 줘요. 내가 들게요.”

“아녜요. 제가 할게요.”

에몬은 레브리안의 만류에도 묵직한 상자를 빼앗듯 건네받았다. 드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무게감에 살짝 휘청했지만, 태연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쁜 아가씨가 이렇게 무거운 걸 들면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이런 일 해야 하면 언제든 날 불러요.”

“괜찮아요. 제가 들게요.”

“아이, 내가 든다니까 그러네. 이거 어디로 옮기면 됩니까? 앞장서요.”

에몬이 상자를 머리 위로 들어버리는 바람에 레브리안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이런 거 들어주는 건 일도 아닌데.”

에몬은 껄껄 웃더니 레브리안을 따라 창고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일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그는 상자를 끌어안은 채 레브리안을 힐끗거렸다.

볼수록 매혹적인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자 나비의 날갯짓처럼 우아한 속눈썹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치겠군.’

에몬은 공연히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아뇨, 괜찮아요.”

“어렸을 때부터 일했다고 들었는데.”

“네.”

“신전에서는 어쩌다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까?”

에몬의 질문에 레브리안은 잠시 멈칫하였다. 거기에 대해 말을 시작하려면 필연적으로 클라인을 입에 올려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에몬 앞에서 클라인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러려면 일을 해야 했으니까…….”

레브리안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에몬의 걸음은 처음보다 느려졌다.

“레브리안.”

“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나를 따라가면 평생 돈 걱정은 없게 해줄게요.”

에몬 질은 레브리안의 풍성하고도 탐스러운 백금발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 아버지의 빚도 전부 갚아주고, 원하는 건 전부 해줄게요. 여기에서의 삶을 놓고 멀리 떠나는 게 물론 걱정되겠지만…….”

다시 시작된 그의 구애에 레브리안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전 사실 오스트린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 좋은 생각이 났어요.”

“…….”

에몬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레브리안을 쳐다보았다.

“오늘 일 때문에 여길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로튼에 돌아가야 하는데…… 나랑 같이 로튼에 한 번 다녀와 볼래요?”

“네?”

“한 번 가보고 결정해요. 얼마나 좋은 곳인지, 그리고 당신과 내가…… 살게 될 저택에 얼마나 근사한지 한 번 보고 오자고요.”

“…….”

“아니, 아니지. 그러지 말고 우리.”

에몬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와하하 웃었다.

“저택을 보러 갑시다. 당신이 직접 골라봐요. 로튼 일대를 샅샅이 뒤져서 우리가 살 근사한 집을 고르자고요. 그리고 우아하고 멋진 가구들로 전부 채우는 거예요. 어때요?”

“…….”

“레브리안, 당신에게 모두 다 해주고 싶어요. 내게는 작위도 그럴싸한 명함도 없지만, 누구도 내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깟 작위는 돈으로도 살 수 있는걸요.”

에몬은 어느덧 복도 한가운데 멈춰 있었다. 그를 따라 레브리안도 발을 딱 붙이고 섰다.

“원한다면 대저택도 당신에게 줄게요. 내게 필요한 건 오직 당신이거든.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 오손도손 사는 것만이 내가 원하는 거예요.”

“…….”

“당신을 닮은 아이들을 낳고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귀여운 아이들의 웃음으로 대저택을 채우면서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는 정말 대답을 미룰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아 애먼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오, 이런. 손이 왜 이렇습니까?”

에몬은 황급히 상자를 내려놓더니 레브리안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아.”

“손이 왜 이래요. 언제 다쳤어요!”

“아니, 괜찮아요. 별거 아닌…….”

“별거 아니라니. 손바닥이 완전히 까졌는데.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요. 내게 상처에 특효인 연고가 있어요.”

에몬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 힘을 주었으나, 그는 도저히 놓아주지 않았다. 어딘가 강압적으로 느껴지는 사내의 완력에 당혹감을 드러내던 찰나였다.

어딘가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돌리자 멀리 클라인의 모습이 보였다.

“신관님.”

레브리안의 음성에 에몬 역시 클라인을 발견했다.

“아이고, 신관님. 여기서 다시 뵙습니다.”

‘여기서 다시 뵙는다고? 신관님께서 에몬 씨를 만나보신 건가?’

그러나 정작 클라인에게 그들의 인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꽂힌 건 오직 에몬과 레브리안이 서로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모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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