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클라인은 처음 레브리안을 마주했던 순간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열다섯 살 소녀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당차고 건강하였다.
게다가 볼품없는 옷으로도 가릴 수 없었던 기품과 아름다움. 빗질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마치 태양 볕처럼 따스하고 찬란하게 느껴졌을 백금발 머리카락까지.
그녀는 신전에서 잡일을 하며 고고하고 우아한 여인 대신 당차고 천진한 여인으로 성장하였으나, 아름다움은 도저히 가릴 수 없었다.
레브리안의 미모가 돋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녀를 노렸던 수많은 사람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나 오늘처럼 노골적인 말을 눈앞에서 듣자, 클라인은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머리카락 색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게다가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에몬은 레브리안의 청초한 자태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 나른하게 중얼거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목소리를 바꿨다.
“아, 신관님께서도 아실지 모르는데. 아니, 아마 모르실 겁니다. 신관님께서 일개 하녀를 일일이 기억하시지는 않으실 테니 말입니다.”
에몬의 말에 탁자 아래에 놓인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대로 주먹이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클라인은 온 힘을 다해 분노를 참아내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여기서 일하는 잡부랍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백금발에 피부가 희고 입술이 붉은 여자면 창부라도 상관없었거든요.”
그녀를 사랑해서도,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에몬 질이 원하는 건 레브리안의 젊음과 아름다움뿐.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창부라도 상관없어요.’
그중에서도 희귀한 머리카락 색깔이 결혼을 결심하게 한 이유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나자 허탈한 마음과 무력감이 진해졌다.
사실 마음 한구석에는 에몬 질이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는지 모른다. 중요한 건 레브리안의 행복이었으니까.
제가 이곳에서 고통으로 말라가도, 그녀만 행복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우 그런 이유였다니.
잡부든 창부든 상관없이, 그저 머리카락 색만 제가 원하는 것이었다면 됐다니.
그녀를 향한 마음이 진해질 때마다 제 팔에 붉은 선을 그려 넣으며 참아왔다. 바스러질 듯 주먹을 세게 쥐자 사제복 속에 숨겨진 손목과 팔뚝에 통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뭐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것만 같은데.
통증을 참아내려 어금니를 세게 문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오직 백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어야만 했죠. 신관님 앞에서 이런 말씀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사실 저는 얼굴도 상관없었어요. 그런데 얼굴까지 아름다우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지요. 아마 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는 신께서 보내신 게 아니실까 해요.”
에논 질은 입을 열수록 가관이었다.
손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에 미간을 살짝 구겼다 펴자 에논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가 색이 죽은 입술을 슬그머니 붙였을 때, 클라인이 건조한 면면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만약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원래는 다른 색이었다면요?”
“예……? 그, 그럴 수도 있습니까?”
순간 당황한 에몬은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 정말 그럴 수가 있습니까? 머, 머리카락 색이 변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이건 태어날 때부터 신께서 내려주시는 게 아닌가요?”
“아닌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내내 얼굴에 피어 있던 설렘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의 표정이 변한 걸 확인했을 때, 클라인은 말을 멈춰야 한다는 걸 알았으나-
“제가 괜한 말을 꺼냈군요. 아닙니다.”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어 자리를 계속 비울 수 없군요. 그리고 에몬 씨께서 바로 약재를 구하실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깝지만…….”
“자, 잠깐만요 신관님.”
에몬은 클라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니, 제가 못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필요하신 양이 얼마나 되시지요?”
클라인은 그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양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초는 보통 얼마나 보관할 수 있습니까?”
“잘 말린 것들은 몇 년, 아니 그 이상도 가지요.”
“그럼 적어도 대략 천 명의 사람들에게 일 년 정도 쓸 수 있는 만큼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클라인의 말에 에몬은 눈을 크게 떴다.
신관이 원하는 약초의 양이 적었다면, 그저 다른 상인에게 넘길까도 생각했는데 절대 남에게 넘길 수 없는 양이었다.
“로튼에 다녀오겠습니다, 신관님. 제게 맡겨주시죠.”
“중요한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대답을 듣고 가면 좋겠지만…… 살던 곳을 떠나는 건데 마음을 먹는 게 쉽지 않겠지요. 그래도 사나흘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 안에 제가 어떻게든 준비해 오겠습니다.”
에몬은 처음 약재에 관한 말을 꺼냈을 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 생각했던 것보다 클라인이 매입하려는 약재의 양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시죠. 그럼 필요한 약재의 종류를 적어 보낼 테니, 금액을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보통 거래는 어떤 식으로 합니까?”
클라인의 말에 에몬은 장사꾼 특유의 넉살 좋은 얼굴을 지어 보였다.
신전에 오면 늘 만날 수 있는 사람인 데다 유명한 가문의 자제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바깥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조금 더 올려서 불러도 어차피 모를 테지. 이 기회에 한몫 단단히 챙겨?’
이런 생각으로 에몬은 입술을 비틀었지만, 최대한 느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신관님께서 제게 장난을 치실 리도 없으니 편하실 대로 해주세요.”
“그럼 계약금으로 절반을 드린 뒤, 물건 확인하고 나머지를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그럼 저야 감사하지요.”
클라인의 말에 에몬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온 가문의 장자라고 했던가? 엄청나군.’
사무실을 벗어난 에몬은 두 볼이 붉게 상기될 만큼 신이 나 있었다.
신관이 약재를 원한다기에 많이 사봤자라고 생각했다.
대충 원하는 약재의 규모를 보고 결정하려 했는데, 이게 웬걸 이 젊은 신관은 그야말로 엄청난 양을 주문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돈을 벌게 되어 신이 났지만 동시에 레브리안이 걱정되었다.
조만간 대답해달라고 그렇게 졸랐는데, 일 때문에 오스트린을 비워야 하는 상황이 오다니.
그러다 돌연 젊은 신관이 남긴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만약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원래는 다른 색이었다면요?’
물론 지금 머리카락은 제가 원하는 완벽한 색이니 상관없었다.
에몬은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으나, 사실 테아노 마이어의 저택에서 라비엘리를 본 순간 그녀의 아름다움에 첫눈에 반하였다.
여러 사업을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을 만나고 제국 여기저기를 떠돌았으나 라비엘리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신이 내린 유일하고도 완벽한 피조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깨뜨린 것이 바로 레브리안이었다.
라비엘리와 흡사한 외모에, 어쩌면 그보다 더 황홀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
설령 뒤바뀐 머리 색이라고 해도 지금은 금발 머리니 아무 상관 없다 싶다가도 어딘가 석연찮고 찜찜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인간이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더니 제가 딱 그 꼴이었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지금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으나, 입 밖으로 내뱉은 것과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 한 번 알아보자. 아내가 될 여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게 나쁜 것은 없으니 말이야.’
헤르젠 루즐에게 물어봐야 어차피 나올 것이 없었다.
‘그래…… 그녀의 어머니와 출신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그런 생각 끝에 에몬은 신전까지 온 김에 레브리안을 만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을 나와 어슬렁거리던 차에 먼발치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하녀를 마주하였다.
“저기, 여기 혹시 레브리안 루즐이라는 여인이 일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 레브리안이요.”
비질을 멈춘 하녀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마 창고에 있을 거예요. 이 길을 따라 쭉 가다 금색 석상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세요.”
“고맙습니다.”
에몬의 얼굴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