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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41)화 (41/136)

41화

“이건 저쪽에 두어라.”

“네, 신관님.”

신전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뒤에 루미온을 위한 중요한 행사가 있을 예정인 탓이다.

사실 하인들에게 지시만 내려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클라인은 부러 직접 기구를 옮기고 하나부터 열까지 관여하고 있었다.

끝없이 몸을 움직이며 저를 옭아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을 때였다.

“신관님, 꽃은 어디에 둘까요?”

아직 만개하지 않은 꽃 한 묶음을 들고 온 하녀가 물었다.

하늘하늘한 꽃잎이 둥글게 포개진 라넌큘러스였다.

품 안에 가득한 연주홍빛 꽃을 마주하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다. 제단에 올렸다가 기한이 다 되어 내려지는 꽃을 잘 말려 곧잘 장식을 만들었다. 어릴 적부터 뭐든 빨리 배우고 손끝이 야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만든 장식은 신전 사람들에게 제법 인기가 좋았다. 차라리 돈을 받고 파는 게 어떻겠냐는 루스의 말에도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레브리안 루즐, 그 아이는 그렇게 한 점 욕심조차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라고 왜 원하고 바라는 것이 없었겠는가.

생각해보니 정작 그녀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자격이 없는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으면서 무엇이 레브리안을 행복하게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바람은 전부 저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돌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 신관님.”

다시 들려온 음성에 고개를 들자, 꽃묶음을 들고 있던 하녀가 클라인을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꽃은 어디에 두면 될까요?”

“저기, 제단 오른쪽에 가져다 두거라.”

“네.”

하녀는 빠르게 대답한 뒤 종종걸음으로 걸어서는 제단으로 향했다.

적어도 일하는 동안에는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신전 안에 있는 것 중 어느 것 하나 그녀를 떠올리지 않게 하는 것이 없었다.

눈을 뜨면 사방에 널린 것이 레브리안을 생각나게 했으며, 감으면 아련한 상상에 젖어 들었다.

오늘 장식된 꽃들도 며칠 후에 만개할 것이고 그런 뒤에는 천천히 시들 것이다. 향기를 다 한 꽃이 내려지면 레브리안은 그것을 엮어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래, 이번에도 그 아이가 무언갈 만드는 걸 지켜볼 수 있겠지.

행여 그사이 어디론가 가버린다거나 홀연히 오스트린을 떠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들이 쌓여 클라인의 미간을 단단히 굳혔을 때였다.

“신관님.”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얼굴이 서 있었다.

아직 제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으나 클라인은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후작님으로부터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클라인 이온 신관님이 맞으시지요?”

사내는 다부진 체격에 타고난 강골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강인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상대하기 쉽지 않을 듯했다.

입꼬리가 항상 위를 향하는 것이 얼핏 인상이 좋은 듯 보였으나 그저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네, 맞습니다.”

“역시. 얼굴에서 빛이 날 만큼 근사한 분을 찾으면 될 거라더니 무슨 말씀인지 바로 알겠네요.”

에몬 질은 처음보다 두 배는 크게 입을 벌리며 넉살 좋게 웃었다. 하지만 커다랗고 깊은 두 눈은 그대로 클라인을 응시하고 있어 어딘가 기괴해 보였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클라인의 말에 에몬은 고개를 꾸벅거렸다.

“예, 물론입니다. 신관님.”

“케일라.”

클라인의 음성에 걸레질하던 하녀가 냉큼 달려왔다.

“재단 정리는 이쯤에서 끝내거라. 나가기 전 소등하는 것 잊지 말고.”

“네, 신관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딜 가든 엄숙한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인지 에몬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클라인의 뒤를 쫓았다.

클라인은 에몬을 데리고 대신전을 벗어나 업무를 보는 사무실로 향했다. 둥근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을 때, 클라인은 그제야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에몬 질은 아래턱이 잘 발달된 얼굴에 구릿빛 피부 탓에 몹시 건강해 보였다. 고집이 세 보이는 매부리코에 특히 눈이 깊었다.

속내를 잘 들여다볼 수 없을 것 같은 흑색 눈동자, 클라인은 본능적으로 쉽지 않은 상대임을 짐작하였다.

“이야, 신전 안에 있는 사무실에는 처음 들어와 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들어와도 괜찮은 겁니까?”

에몬은 클라인의 시선을 맞받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신전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입니다.”

“그렇습니까?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워낙 멀고도 어렵게만 느껴져서 말입니다.”

인사말 같은 대화가 두어 번 더 오간 뒤,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클라인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제가 뵙기를 요청드린 건 약초를 구매하고 싶어서입니다.”

클라인의 말에 에몬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후작님께 대충 말씀은 들었습니다. 특별히 신관님께서 요청하신 일인 만큼 제가 최상품으로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데 빨리 준비해야 하나요?”

에몬의 질문에 클라인은 묘한 낌새를 느꼈다.

“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만.”

“아.”

“몸이 아픈 자들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도움을 드려야 하니까요. 혹시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클라인의 질문에 에몬이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소였다면 당장에라도 로튼으로 돌아가 필요하신 걸 가져올 텐데 말입니다. 사실은 그게.”

에몬은 주저하더니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오스트린에 온 건 일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거든요, 신관님.”

“개인적인 용무요?”

에몬이 말을 이을 때마다 클라인의 가슴은 불쾌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개인적인 용무란 바로 레브리안과의 혼사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신관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제가 하는 말이 행여 불경스럽게 들릴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의 대리인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괜찮으니 말씀해보세요.”

클라인은 제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지 않게 하려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조급해 보이지 않게, 무언가 다른 걸 노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호흡을 잘 다스려야만 했다.

“아닙니다, 신관님. 다른 곳도 아니고 신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야 없지요.”

그가 주저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에몬 질은 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아내로 맞이하려는 여인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히 입방아에 오르게 될까 봐, 말이 퍼져서 좋을 것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클라인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무슨 말이든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이 사내에 대해 조금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텐데.

클라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개인적인 이유로 당장은 약초를 가져올 수 없다는 말입니까?”

“아, 며칠만 말미를 주실 수는 없습니까? 저도 여기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라서요.”

“무슨 대답입니까?”

에몬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내 두 손을 허공에 한 번 들었다가 내렸다.

아무래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여기 온 건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사내의 입을 풀어내려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클라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뜩 굳어 있던 입매를 풀었다.

“고맙습니다, 신관님. 그런데…… 여러 사정이 있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내 되실 분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일생일대의 기회를 눈앞에 두었다고나 할까요? 행여 제가 오스트린을 비운 사이 그녀가 올까 봐…… 사실 지금은 어디를 갈 수가 없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가슴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

“그렇군요.”

짤막하게 대답한 뒤 터질 듯 박동하는 심장을 달래야만 했다. 지금 클라인이 할 수 있는 건 겨우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은 갈 수가 없습니다, 신관님. 물건이 급하게 필요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가정을 이루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 맞지요. 그런데…….”

“이해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여인은 어떤 분입니까?”

클라인의 질문에 에몬은 얼굴을 붉혔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입술까지 길게 늘어뜨리며.

“신관님, 저는 사실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요. 오직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머리카락 색이 어디 흔한가요? 보통 귀한 혈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거짓으로도 대답할 수 없어 클라인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귀한 여인이 제게 올 리도 없고요. 그런데 이번에……. 예,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에몬 질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내는 척하며 낄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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