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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40)화 (40/136)

40화

레브리안은 얼먹은 표정으로 복도를 쓸고 있었다.

제 키만 한 빗자루를 쥐고 허청허청 움직이는데 정작 어디를 쓸고 있는지, 제가 지금 무얼 하는지조차 모르는 얼굴이었다.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던 루스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그…….”

루스는 레브리안이 처음 신전을 드나들던 시절부터 그녀를 지켜보았다.

클라인이 뒤에서 그녀를 보호했다면, 루스는 어머니처럼 나서서 레브리안을 돌봐왔다.

덕분에 클라인의 시선도, 레브리안의 마음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를 아끼기 때문에 누구보다 신관의 애정을 경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가여운 것.’

루스는 손에 든 걸레를 움켜쥐고 레브리안에게 다가갔다.

“레비.”

하지만 레브리안은 루스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빗자루 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레비?”

다소 엄한 목소리를 내자 레브리안은 그제야 깊은 우울에서 빠져나왔다.

“아, 루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청소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루스의 말에 레브리안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제대로 하겠습니다.”

레브리안이 넋을 놓고 있는 건 사실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오전에 그 험한 꼴을 당한 데다 신관에게 불려갔다 왔으니 기운이 없을 만도 했다.

루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레브리안이 들고 있는 빗자루를 뺏어 들었다.

레브리안이 놀란 얼굴을 하자 루스가 고갯짓하더니 입을 열었다.

“됐으니 이쪽으로 와서 앉아봐.”

“…….”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혼이 날 게 분명했다. 루스는 인자하고 정이 많은 여인이었으나 엄격한 면이 있었다.

레브리안이 두 손을 꼭 모은 채 고개를 숙이자 루스가 빗자루를 옆에 두더니 말문을 열었다.

“좀 괜찮니?”

뜻밖의 질문에 레브리안은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사실 저 때문에 여러 사람이 신경을 쓰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네, 괜찮아요.”

“나쁜 사람 같으니. 고운 얼굴에 이 무슨.”

루스는 발갛게 부어오른 레브리안의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야? 혹시…….”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루스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부모 없이 건강하고 영민하게 자란 것은 대견했으나 세상은 험했고 그녀는 여전히 어렸다. 게다가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는 나쁜 일에 휘말리기에 딱 좋았으니 말이다.

행여 돈 때문에 사고를 친 건 아닌지, 루스가 미간에 잔뜩 근심을 담았다.

레브리안은 루스의 그런 염려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예요.”

“뭐라고?”

“오전에 찾아온 사람, 제 아버지예요.”

레브리안은 클라인에게 했던 이야기를 루스에게도 전부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한 루스가 결혼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잠깐, 그러니까…… 네 아버지 빚을 갚아준다는 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매일같이 신전에 와서 행패를 부릴 거예요.”

“오, 맙소사.”

“그럼 저는 여기서 더는 일할 수 없을 테고 결국 그분과 결혼을 하게 되겠죠. 차라리 지금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레브리안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루스는 그녀가 톡 건드리면 눈물을 쏟을 만큼 위태롭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 빚을 전부 갚아준다는 걸 보면 돈은 많은 사람이겠죠. 언젠가는 저도 결혼을 해야 할 텐데, 어쩌면 제게도 좋은 기회일지 몰라요.”

“레비.”

루스는 레브리안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체념과 우울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나 제가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브리안을 말릴 수도,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 결혼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스는 처음 레브리안이 짓고 있던 것과 비슷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더는 레브리안의 울적한 얼굴을 탓할 수도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루스와 헤어진다는 것뿐이에요.”

“……레비.”

“여기서 로튼은 많이 멀겠지요?”

루스는 늘 레브리안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신의 실수가 분명하다고 말이다.

신전에서 청소만 하기에는 아까운 아이였다. 그런 이유로 클라인이 레브리안을 각별히 생각한다는 것도 알았다.

수수께끼를 내고 그녀에게 책을 읽히며 안타까움을 달래왔던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농도가 점점 짙어질수록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힐수록 루스는 불안했다.

젊은 신관이 애정에 눈이 멀어 제 미래를 망칠까 봐, 소녀가 저도 모르는 사이 논란에 휘말릴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레브리안을 단속해왔는데.

루스는 지금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혼할 사람이 나타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안타깝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그분은 만나봤니? 어떤 사람인 것 같아. 좋은 사람이니?”

조급한 마음 탓인지 루스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네, 좋은 분이신 것 같았어요. 더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게 도와주신다고 하셨고요. 수도로 가서 편히 살 수 있게 해주신다고도 했어요.”

하녀로 살아가는 레브리안에게 분에 넘치는 제안이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 말고.”

루스가 조금 더 단단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것만으로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단다.”

루스는 레브리안의 순진하고 여린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레비, 난 네가 정말 행복하길 바라.”

“저도요. 저도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저는 여기서 일하는 게 행복해요. 다른 건 바란 것도 없고요. 물론 언젠가 결혼을 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레브리안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는 아니었어요.”

“대화는 얼마나 해봤니?”

“대화요?”

레브리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대화란 서로의 말을 주고받는 것인데 생각해보니 그저 앉아서 에몬의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그래, 그 사람은 무얼 좋아하는지 너는 무얼 좋아하는지는 이야기를 나눠보았니?”

“아뇨.”

“다음에 만나거든 그런 이야기를 해보렴.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사소한 습관이나 취미 같은 걸 말이야.”

레브리안은 루스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얼마나 많은지, 손에 쥔 것만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어.”

루스의 말에 레브리안은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닌걸요.”

“레비.”

“솔직히 아버지의 빚을 다 갚아주고 앞으로 편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요.”

“…….”

“일이 힘든 건 아니지만, 편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루스는 아무 말 없이 레브리안의 말을 들어주었다.

“제게 뭐든 다 해주겠다는 걸 보면 좋은 사람 같다가도, 이런 식으로 하는 결혼이 행복할까 싶다가도…… 거절하면 아버지의 빚은 또 어쩌나, 여기서 일해서 버는 돈으로는 죽었다 깨도 해결할 수 없는데.”

“레브리안.”

“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루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레브리안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앉아 그녀가 남긴 말을 곱씹을 뿐.

그러다 조심스레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신관님께 의논드려 보았니?”

레브리안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시든?”

“결혼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고요.”

레브리안은 그 말을 떨어뜨리던 순간의 클라인을 떠올렸다.

어딘가 불편하고 초조해 보이던 얼굴, 나는 그 속에서 대체 무엇을 바랐던 것인가.

한심해.

레브리안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을 때, 루스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레비, 신관님 말씀이 옳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의 빚도 돈도 중요하지만, 네 인생과 비교할 수는 없는 거야.”

“…….”

“혹시 다른 말씀…… 하신 건 없니?”

루스는 행여 레브리안의 결혼 소식이 클라인을 흔들까 봐 겁이 났다.

차라리 이리저리 흔들리는 성정이라면 모를까, 클라인처럼 강직한 자일수록 단번에 부러질 확률이 높았다.

“네,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레브리안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래……. 아직 시간은 있는 거지?”

“네, 그분은 대답을 빨리해주길 바라시지만요.”

“천천히 생각해보자. 제일 중요한 건 네 행복이라는 걸 잊어선 안 돼. 알겠니?”

“네, 그럴게요.”

레브리안의 대답에 루스는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런 식의 말밖에는 해줄 것이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일어나서 마저 하자꾸나.”

“루스, 고마워요.”

여전히 맥빠진 얼굴이었으나 레브리안은 웃음을 보여주려는 듯 애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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