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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39)화 (39/136)

39화

클라인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내였다.

신력을 깨닫고 신관이 되기 전부터 늘 정적이었다. 외부의 자극보다 내면에서 들리는 말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했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홀로 명상하기를 즐겼다.

그런 클라인의 즐거움을 빼앗은 것이 바로 레브리안이었다.

그녀는 클라인에게 홀로 느껴온 즐거움을 가져가고, 그의 가슴에 완전히 다른 것을 채워 넣었다.

클라인은 늘 레브리안에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냈다. 명석한 레브리안은 늘 클라인이 내는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왔고, 그것은 클라인에게 묘한 기쁨을 주었다.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가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것도 레브리안이었다. 서로 마주 본 채 미소를 나누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한 것도, 이타적인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누군가를 위한 마음이 이토록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도 그녀가 알려주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레브리안에게 서서히 젖어 들었다. 어딘가 달라진 제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클라인의 청색 눈동자에 감정이 묻어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에몬 질?’

테아노는 저를 마주한 신관의 얼굴이 몹시 불안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평온한 척하려 애를 쓰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우수에 젖은 눈동자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일단 이쪽으로 와서 좀 앉으시지요.”

테아노의 손짓에 클라인이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짧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어쩐지 부담스럽기도 했다.

“차를 좀 내오라고 할까요?”

테아노의 말에 클라인의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길어질 이야기는 아닌 듯해 테아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 에몬 질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로튼에서는 그자를 모르는 이가 없지요.”

“그렇습니까?”

테아노는 편안하게 웃어 보이며 이 젊은 사내가 왜 제게 에몬에 관해 묻는지를 추측해보았다.

‘설마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

그는 신전에 도착한 첫날, 클라인을 마주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젊은 신관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소녀의 아름다운 잔상을 말이다.

‘설마 하녀가 결혼한다는 것 때문에 찾아왔으리라고.’

하지만 사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큼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하녀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낡아빠진 치마 대신 깨끗한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만 손질한다면 공작가의 영애라고 해도 믿을법했다.

‘아무리 그래도 신의 아들이 하녀에게 마음을 줬을 리 없지.’

그는 클라인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대신관 다음으로 높은 신력을 가진 데다, 신관이 되기 전부터 화려한 외모로 주목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알고 싶지 않아도 클라인은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습관적으로 제 수염을 매만지려던 것을 참아낸 테아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몬은 로튼에서 이것저것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후작께서 잘 아시겠군요.”

여기까지는 이미 레브리안에게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클라인이 궁금한 건 이런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에몬 질이라는 사내가 믿을만한 자인지, 그의 환경은 어떠하고 어떤 성미를 가졌는지가 알고 싶었다.

급한 마음에 여기까지 찾아왔으나 사실 테아노에게 쉽사리 물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네, 저와도 오랫동안 거래한 탓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한데 에몬 질에 관해선 왜 물으십니까? 혹시 그자가 무슨 잘못이라도.”

낯선 곳에서 온 후작에게 과연 어디까지 솔직할 것인가.

이 방문을 열기 직전까지도 클라인은 수없이 고민하였다.

레브리안에 대해 적당히 털어놓은 뒤 그 사내에 대한 평판을 들어볼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핑계를 댈 것인지를 말이다.

“아닙니다.”

물론 그녀를 향한 제 마음을 이야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클라인은 레브리안이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신전에 찾아왔으며, 그녀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 정도의 말이라면, 에몬 질을 궁금해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클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제 알량한 속마음을 적당히 포장한 것만 같아서였다. 이런 이유를 말한다면, 후작이 금세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절반의 진실은 때때로 완전한 거짓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이따금 마을로 축성을 하러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약재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병증임에도 방치되어 고통받는 자들이 많더군요.”

“아, 그렇지요.”

“안타까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약재를 공부해서 간단하게나마 써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러셨군요.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테아노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의심은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클라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몬 질이 약재상으로 꽤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로튼에서 이것저것 사업을 하고 있는데 발이 넓어 구하기 어려운 약재도 곧잘 구해오지요.”

그 이후로도 테아노는 제가 황제 폐하의 병증을 치료할 때 필요했던 귀한 약재를 그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부터, 그의 사업 수완에 대해서도 한참을 떠들었다.

하지만 정작 클라인이 궁금한 부분은 그런 게 아니었다.

“거래하시게 된다면 꽤 만족하실 겁니다.”

“그렇군요.”

“외람된 말씀이온데, 신전에서 직접 물건을 받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신관님께서 개인적으로 행하시는 일이십니까?”

테아노의 질문에 클라인은 잠시 멈칫하였다.

완전히 의심을 벗어나려면 신전 뒤에 숨는 것이 나았지만, 그런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렇군요. 훌륭하십니다.”

대충 미소를 보인 뒤, 클라인이 내내 참아왔던 말을 드디어 떨어뜨렸다.

“그럼 그자를 제가 직접 만나볼 수 있을까요?”

클라인은 그가 오스트린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브리안의 대답을 기다리며 이곳 어딘가에서 손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그의 기도가 루미온 님에게 과연 닿았을 것인가.

신께서 과연 그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인가.

사람들의 기도에 힘을 보태야 하는 일을 하면서, 정작 그의 기도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짙었다.

클라인은 스스로에게 몹시 환멸감을 느끼며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물론이죠. 마침 에몬이 오스트린에 와 있습니다.”

에몬은 클라인이 알고 있는 것처럼 레브리안과의 혼사를 위해 오스트린에 체류 중이었다.

‘이런 말까진 굳이 할 필요 없겠지.’

“다행이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오스트린에 있다는 사실은 다행인 동시에 끔찍하게 느껴졌다.

정중하게 대답한 클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곧 사람을 보내지요.”

문밖으로 나온 직후, 클라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테아노 후작은 별다른 눈치는 채지 못한 것 같았고, 제가 만들어낸 핑계는 꽤 그럴싸했다.

다시 긴 복도를 걸으며 클라인은 오른손을 제 가슴 위에 올렸다.

‘어두운 곳에 있는 자들을 위해 약재를 사서 베푸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에게 약속한 뒤, 클라인은 다시 신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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