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클라인에게 붙잡힌 손목에 열이 오른다. 그의 불안한 시선이 레브리안을 옭아매기 시작했으나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신관님.”
다만 벗어나려 가까스로 클라인을 불렀을 때였다. 클라인 역시 잔뜩 당황했음을 숨기지 않으며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지만 레브리안의 손목에는 여전히 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를 그대로 보낼 수 없어 일단 붙들긴 했는데 레브리안이 황망히 저를 올려다보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입을 꼭 붙이고 그녀를 빤히 보는데 레브리안이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클라인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레브리안을 보내면, 정말 모든 게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에몬 질에게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낼 수 없다는 말을 어떤 식으로 해야 좋단 말인가.
“얼굴은…… 괜찮은 것이냐.”
클라인은 결국 레브리안을 붙잡지 못했다.
헤르젠에게 맞은 뺨은 여전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색함을 달래려는 건지 클라인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네, 괜찮아요.”
“혹시 좋지 않으면 루스에게 이야기하거라.”
“고맙습니다, 신관님.”
그러고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쾅.
레브리안이 나간 뒤, 클라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것처럼 두 팔을 허공에 떨어뜨렸다.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라도 짚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얼마간 문을 앞에 두고 서 있던 그가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터덜터덜 걸어 책상으로 향한 그가 의자를 잡아당긴 뒤 털썩 주저앉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열기와 분노, 혼란이 뒤엉겨 클라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젠장.”
클라인은 살면서 오늘과 같은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 아무것도 보고 듣고 싶지 않았으며, 흙이라도 파서 입에 넣은 것처럼 목구멍부터 배 속이 텁텁했다.
갑작스럽다는 말 이상의 혼란스러움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이런 절망스러운 상황에 부닥쳐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고민을 토로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클라인은 지독하게 외로웠다.
‘에몬 씨는 친절하고 좋은 분이세요.’
그자를 이야기할 때 레브리안의 표정은 어땠지?
한심하고 못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클라인은 조금 전 대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절하고 좋은 분이라니. 고작 한두 번 만난 게 전부일 텐데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결혼하면 로튼으로 떠나야 하는 게 조금 겁이 나긴 해요. 로튼은 수도고 굉장히 번화한 곳이라고 들었어요. 오스트린과는 완전히 다르겠죠. 그래서 뭐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요.’
레브리안이 궁금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도 닿지 못한 신세계,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제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고 싶은 건 당연한 욕구였다.
그녀의 말처럼, 레브리안이 언젠가 신전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된 그녀가 언제까지고 신전에 남아 잡일을 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잡부로만 살기에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안타까웠고 젊음이 가여웠다.
레브리안이 나이 많고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팔려 갈 뻔했을 때 몇 번이고 막은 것이 그였다.
다행히 사람들은 명망 높은 신관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몇 번의 혼사를 막으면서도 클라인은 늘 생각했다. 레브리안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적당한 사내가 나타나면 얼마든지 그녀를 보내줄 것이라고 말이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으나 정말 괜찮은 사내가 나타날까 봐 두렵기도 했다. 동시에 레브리안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라기도 했다.
이따금 그런 현실적인 생각에 닿을 때면, 클라인은 다소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그녀의 안녕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왔다.
제 마음의 크기가 어떤 줄도 모르고, 진심이 어디에 가까운 줄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멀게만 느껴졌던 일이 코앞에 닥치자-
클라인은 제가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럼 결혼이라도 하죠, 뭐.’
에몬 질은 괜찮은 사내인가?
지금껏 괜찮은 사내가 나타나면, 하는 마음 뒤에 숨어 있었는데, 과연 그는 적당한 사내인가?
이기적이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안 돼, 그것만은 절대.’
클라인은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문을 박차고 나간 젊은 신관은 곧바로 로튼에서 온 의사가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 * *
테아노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약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태후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서신이 올 때가 되었는데.’
그는 짧고 빳빳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돌아올 답장을 기다렸다.
테아노는 부러 루시안이 아닌 라비엘리의 하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시안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하녀인 메이지가 훨씬 솔직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어도 메이지는 거짓말을 할 생각은 못 하겠지. 밤마다 무슨 소리가 들렸을지 잘 관찰했을 테고.’
테아노는 부러 라비엘리에게 어리고 순진한 수발 하녀를 붙였다. 그녀에게 충실한 것도 중요했으나 우선 제 말을 잘 듣는 것도 중요했으니 말이다.
‘약효가 잘 들어야 할 텐데.’
헤레스로부터 약을 받은 첫날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묵직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라비엘리의 몸이 저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다면, 얼마나 황홀한 밤이 펼쳐질 것인가!
테아노는 입술을 씰룩이며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생각만으로도 중심에 뜨거움이 밀려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순간 신전에서 마주쳤던 잡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백금발에 푸른색 눈동자의 소녀-
‘이름이 레브리안이라고 했던가.’
테아노는 천천히 아랫도리를 만지며 생각에 젖어 들었다.
‘에몬 질에게는 너무 과한 여인이지. 아버지가 노름꾼이라고 했던가…….’
그는 조심스레 책상 서랍을 열고 따로 보관한 약초를 꺼냈다.
마약 성분이 있어 조심해서 써야 할 벨라도나와 티티에 잎이었다. 그는 종이봉투에서 벨라도나를 한 움큼 꺼내 들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그러고는 잘 말린 티티에 잎을 손으로 부순 뒤, 혀끝에 살짝 대고 음미했다.
“하…….”
천천히 눈을 감자 야릇하고 나른한 기운이 천천히 퍼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냄새에 취한 테아노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테아노는 퉁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바지춤에서 손을 뗀 뒤 옷매무새를 살핀다. 아무래도 편지가 온 모양이라 생각한 테아노가 종이봉투에 벨라도나를 집어넣고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가루로 만든 티티에는 대충 책상 바닥으로 털어버렸다.
‘편지가 왔나?’
“들어오세요.”
그의 대답이 떨어지자 얼마간 정적이 흐른 뒤 천천히 문이 열렸다.
하지만 테아노가 기대하던 얼굴은 아니었다.
“신관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인이었다. 우아한 사제복을 입고 들어온 사내는 짙푸른 청색 눈으로 테아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온화하게 예를 갖추었다.
“지내시기에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네, 아주 좋습니다.”
테아노는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으나 사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관이 직접 서신을 들고 올 리는 없고.’
“다행이군요.”
이미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하고 싶은 말이 차 있었지만, 클라인은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은은한 풀냄새에 고개를 돌리자 책상 위에 이름 모를 약초들이 놓여 있었다.
“좋은 향기로군요. 태후 전하의 병증에 쓰이는 재료들입니까?”
“네, 지금 드시는 약재로는 호전되지 않아 다른 방법을 찾는 중이었습니다.”
테아노는 저도 모르게 서랍을 한 번 힐끗거린 뒤 태연히 대답했다.
티티에는 여전히 혀끝에 살짝 남아 있었다. 남은 가루를 바닥에 털어버리길 잘했다고 생각했으나 다소 아쉽기도 했다. 티티에는 거래가 불법이라 고작 동전 크기만큼을 구하는데도 꽤 많은 돈을 써야 했던 탓이다.
“감사합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네, 그러지요.”
테아노는 이 젊은 신관이 한시라도 빨리 본론을 말하고 나갔으면 했다.
티티에 맛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습니까?”
“……아, 후작께서 로튼에서 오셨으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혹시 에몬 질이라는 사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