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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37)화 (37/136)

37화

“빚을 갚지 못하면 아버지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하셨어요.”

“…….”

하지만 머리가 지끈거려, 도저히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없었다. 클라인은 씰룩이는 미간을 애써 잠재우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아버지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널 돈 많은 남자에게 팔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다소 거친 억양이었다.

평소였다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되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남자인 데다, 조금 전 자신의 아버지가 벌인 일련의 사건 때문에 레브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파는 것까진 아니지만, 제가 결혼을 하면 아버지께 도움은 되겠죠. 그분은 돈을 바다에 내다 버려도 될 만큼 부유한 분이시니까.”

그분이라는 걸 보니 이미 상대까지 정해진 모양이었다.

답답함과 허탈감,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허무가 밀려와 클라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침묵 속에 잠긴 클라인을 향해 레브리안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버진 하루라도 빨리 제가 결정을 내리길 원하세요. 갑자기 아버지가 생긴 것도 이상한데…… 남편까지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결혼하지 않을 거면 신전에서 버는 돈을 전부 내놓으라고 하셨죠.”

그러나 이 대목에선 참을 수 없었다.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네, 그렇죠.”

레브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차오른 분노에 내뱉긴 했지만, 다시 생각하자 곧 실수임을 깨달았다.

어찌 됐든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부모의 정이 그리웠을 외로운 여인이다.

한심하고 멍청한 아비일지라도 다른 이의 입에서 험담을 듣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미안하다, 레브리안.”

“아녜요, 절 많이 걱정하고 있으시단 걸 알아요.”

레브리안은 입을 다문 채 미소를 보였다. 오늘따라 그것이 몹시 측은하다.

손에 땀이 찰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던 클라인이 다시 레브리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아버지가 말씀하셨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니?”

확인해야 했다.

레브리안을 차지하려는 사내가 누구인지.

그 빌어먹을 자식이 누군지 알아내야 했다.

클라인의 위치라면 이름만으로 사람을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버려도 상관없을 만큼 돈이 많은 사내라면, 클라인도 알 만한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찾아내서 그가 무얼 할 수 있겠냐만은 우선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로튼에서 여러 사업을 하신다고 했어요. 여관 사업도 하시고…… 아, 그리고 약초와 향신료도 팔고요.”

클라인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에몬. 에몬 질…….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클라인은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무척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스치듯 보았던 얼굴도 단번에 떠올릴 만큼 예리한 기억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약초나 향신료 같은 사치품을 수입하는 장사꾼이라면, 인근에서 제법 힘을 쓸 테니 모를 리가 없다.

‘분명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야. 에몬…… 에몬 질이라.’

그러나 충격 탓인지 영민하던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사랑 때문에 기억은 희미해졌고 질투는 그의 사고를 완전히 멈추게 했다.

‘테아노 후작께서 로튼에서 오셨다고 하셨지. 에몬 질이라는 사내가 약초를 판다고 했으니 후작께서 잘 아시겠군.’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이 남았다.

클라인은 사제가 되기 위해 안수를 받던 첫날보다 더 긴장한 자신을 발견했다.

“레브리안.”

“네, 신관님.”

“너는 어쩔 생각이니.”

두 사람 사이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질문을 던져놓고도 막상 그녀가 대답을 할까봐 두려웠다.

아아, 나는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이런 바보 같은 것을 물은 것일까.

클라인은 레브리안의 얼굴 위에 떠오른 의아함을 읽어내곤 곧바로 후회했다.

“저는요.”

그만, 아무 대답도 하지 말거라.

클라인은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사그라든 마지막 말을 애써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녀가 결혼하겠다고 나서면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이대로 그녀를 잃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가 행복하길 빌어주고 밤마다 그녀를 품에 안을 사내를 축복해야 하는 것인가.

제길, 빌어먹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신관님.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결혼을 해야 할 시기인 건 맞아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으니까요. 저도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겠죠. 하지만 그걸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습게도, 레브리안이 하는 고민의 방향은 클라인의 상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레브리안.”

“에몬 씨는 친절하고 좋은 분이세요. 만약 결혼을 한다면 우리 가족을 위한 경제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하셨죠.”

“뭐?”

레브리안은 에몬 질이라는 장사꾼과 이야기도 나눠본 모양이었다.

“벌써 그런 이야기까지 나눈 거니?”

“아버지께서 데려오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면 로튼으로 떠나야 하는 게 조금 겁이 나긴 해요. 하지만 로튼은 수도고 굉장히 번화한 곳이라고 들었어요. 오스트린과는 완전히 다르겠죠. 그래서 뭐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요.”

클라인은 내내 질문을 쏟아냈고 레브리안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제 감정에 솔직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잘 모를 땐 잘 모르겠다고 표현했고 사실인 경우엔 그렇다고 자백 비슷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클라인은 무너지고 있었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신관님.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제가 꼭 막을게요.”

“…….”

“어떻게든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여인의 푸른색 눈동자에 다시 차오르려는 눈물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녀는 일을 잃을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래, 분명 레브리안이 무서워하는 건 신전에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될까 봐였다.

“아버지가 꽤 거칠어 보이던데, 네가 무슨 수로 막겠다는 거니.”

“그럼 결혼이라도 하죠, 뭐.”

레브리안은 어깨를 들썩이며 농담을 던졌다.

그저 이 답답한 공기를 풀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클라인에겐 통하지 않는 농담이었다.

“알겠다, 그만 나가보렴.”

“저…… 그럼 여기서 계속 일 할 수 있는 거죠?”

“그래.”

네가 떠나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하지만 클라인은 속으로 다시 되뇌었다.

아니, 네가 떠난다고 해도 난 널 보낼 수 없다.

클라인은 오늘, 자신이 이토록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클라인을 애써 외면한 채 레브리안은 손등으로 제 얼굴을 한번 눌렀다.

그러고는 처음 앉았을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관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가 움직이자 클라인이 사랑하는, 고혹적인 향기가 잔잔히 밀려왔다.

천연한 금발이 풍기는 향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자, 꿈속에서 그를 껴안고 애무하던 레브리안의 미소가 가까이 느껴졌다.

“잠깐만.”

그래서 끝내 그녀를 붙잡고 말았다.

클라인의 목소리가 자늑자늑하게 레브리안을 부르자 그녀가 멈춰섰다.

“로튼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얼마 전 여기 오신 후작께서 잘 아실지도 모르겠구나.”

클라인은 우선 에몬 질이 어떤 사내인지 정확히 알아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내라고 해서 레브리안이 결혼하게 둘 마음도 없었으나 일단 알아봐야 했다.

“아, 테아노 후작님 말씀이시지요?”

“그래.”

“그분은 의사라고 하셨으니… 약초상인 에몬 씨를 잘 아시겠네요.”

레브리안은 처음보다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에몬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는 사실이 기쁜 것일까.

그녀의 표정 속에 숨겨진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클라인은 착잡하였다.

“고맙습니다, 신관님.”

레브리안의 고맙다는 말이 어쩐지 클라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물론 사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결혼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결국 이런 식의 뜬구름 잡는 말만 하고 만다.

“네, 그럼요. 저도 잘 생각해서 결정할게요. 신관님 의견도 꼭 듣고요.”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클라인은 고개를 돌리곤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문 입은 말이 없었고 연신 코에서 뜨거운 바람만 흘러나왔다.

레브리안은 잠시 머뭇거리며 클라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늘 완벽한 모습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사제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따로 그녀를 불러 이야기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레브리안은 가슴이 벅찼다.

“고맙습니다.”

문 앞에 선 레브리안이 손잡이를 쥐었을 때였다.

“……?”

갑자기 손목에서 느껴진 낯선 기운에 레브리안이 고개를 틀자.

그녀가 동경해 마지않던, 사내의 냄새가 깊게 밀려왔다.

“신관님.”

레브리안의 손목을 쥔 클라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눈빛으로 레브리안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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