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젠장.”
레브리안의 아버지 헤르젠 루즐은 내딛는 걸음마다 바닥에 욕설을 흩뿌리고 있었다.
볼품없는 차림에 정리되지 않은 매무새, 비틀거리는 걸음 탓인지 그가 걸어갈 때마다 지나는 사람들이 슬슬 피했다.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게!”
치솟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뺨을 걷어 올리긴 했으나 그 정도론 분이 풀리지 않았다.
제 애미를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아비의 부탁도 무시하고 얼굴이 반질해져 있는 꼴이 견딜 수 없었던 탓이다.
화려하게 꾸민 모습은 아니었으나 제법 정돈된 얼굴이지 않았던가.
아비는 빚쟁이에게 쫓겨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딸이라고 있는 것이 반질한 얼굴로 신전에서 고상한 척을 하고 있는 게 못마땅했다.
“그래 봐야 잡부지, 어디 가서 그만한 남자를 만나냔 말이야!”
그녀가 신전에서 나와 에몬 질에게 시집만 간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레브리안이 결혼하면 그녀가 살던 집은 곧장 팔아버릴 것이고, 에몬에게서 받은 지참금으로 떵떵거리기까진 못해도 빚은 전부 갚을 수 있을 테니까.
“신전에서 일한다고 계집애같이 반반한 것들과 지내다 보니 저가 같은 부류라도 된 양 착각하나 보군.”
그러다 문득 서슬 퍼런 얼굴로 저를 찾아왔던 에몬 질이 떠올랐다.
술에 취한 상태로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 썼는데, 그중에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준 게 에몬이었다.
그는 그저 수완 좋은 장사꾼 같은 얼굴이었으나 누구보다 무섭게 헤르젠을 몰아세웠다.
원하는 게 분명해서였다는 건 얼마 후 알게 되었다.
에몬은 그의 딸을 원했다.
하지만 헤르젠은 제 딸이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다. 아이가 어릴 때 집을 나온 이후 제게 부인이나 딸이 있다는 것도 잊고 살지 않았던가.
멍청한 얼굴로 서 있던 그에게 레브리안이 신전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 것도 에몬이었다.
‘자네 딸은 루미온 신전에 있어. 거기서 잡일이나 하면서 살고 있지.’
‘그래서요? 난 그 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가보라는 거야. 가서 결혼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해.’
‘결혼이요?’
‘그래, 결혼. 하녀로 살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만나 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삶이라고 해. 아름다움만 유지한다면 나는 그 애에게 얼마든지 보석을 갖다 바칠 용의가 있거든.’
‘……하, 하지만 제 말을 들어 줄까요?’
‘그건 너한테 달렸지. 그 애가 나와 결혼만 해준다면 네 빚을 전부 탕감해주겠어. 원한다면 지참금으로 다른 곳에서 끌어다 쓴 것도 갚아주지.’
‘저,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성사시키지 못하면 그 뒤에는 재미없을 거야.’
‘…….’
‘이미 밀린 이자만 해도 얼마인지 알고 있지? 만약 제때 갚지 못한다면 난 네 놈의 목이라도 가져갈 거야.’
‘여, 여봐요. 제 딸아이를 원하는 이유가 뭔지 여쭈어도…….’
‘그야 백금발에 우유처럼 흰 피부를 가졌으니까. 난 그런 여자를 원해. 그게 전부야.’
에몬은 마지막 말을 마친 뒤 다시 여유로운 장사꾼의 얼굴로 돌아왔다.
헤르젠은 빚을 전부 갚아주는 것도 갚아주는 것이었으나, 레브리안에게 안겨준다고 말했던 보석과 돈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마치 이미 제 손에 떨어진 것처럼 군침이 흐른다.
‘그래, 딸년이 받은 건 내 것이나 마찬가지지. 제가 누구 때문에 지금 발붙이고 사는 건데!’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레브리안은 예상보다 강경하게 굴었다.
돈 많은 장사꾼에게 시집가는 걸 반기기는커녕, 에몬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더니 생각은 해보겠다고 지껄이는 게 아닌가.
생각할 시간 따위 없다. 에몬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에몬의 눈에 차는 다른 여자라도 생긴다면 정말 곤란하다.
그 순간, 헤르젠의 뇌리에 제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던 사내가 떠올랐다.
‘성스러운 신전에서 부린 행패는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당장 나가십시오.’
빛이 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용모를 가진 사내였다.
그 매혹적인 색깔을 전부 다 음미하기도 전에 마주한 건, 인간이 맞는 것인지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뭐 저렇게 곱상한 사내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무색할 만큼 사내의 아귀힘은 강력했다. 그에게 잡혔던 손목이 여전히 시큰할 만큼.
차림새로 보아 신관인 듯했다. 목을 완전히 덮은 카라, 카라 깃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그것도 제법 높은 위치의 신관.
“높으신 양반이 잡부에게까지 신경 쓸 만큼 한가한가 보군.”
헤르젠은 사내의 말간 얼굴을 억지로 지워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발길 닿는 대로 살고 있다고 해도, 신전에서 난동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은근히 오른 취기가 용기를 주긴 했으나 문 앞에서 어느 정도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결판을 봐야 했다.
고리대금을 하는 자들의 손아귀를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넌 네 아비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거야, 레브리안.”
* * *
“신관님.”
클라인의 상념을 깨뜨린 건 레브리안의 목소리였다.
“혼을 내실 게 아니라면…… 절 왜 부르신 건가요?”
두려움이 아직 전부 가시지 않은 눈동자로 레브리안이 클라인을 힐긋거렸다.
“네가 불편하지 않다면 조금 전 신전에 널 찾아왔던 사람에 대해 묻고 싶구나.”
“…….”
클라인의 말에 레브리안이 미간을 움찔거렸다.
순식간에 바뀐 낯빛을 지켜보며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짐작했지만.
“아버지예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의외의 단어라 클라인 역시 당황하고 말았다.
“아버지?”
레브리안이 열다섯 되던 해, 그녀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기둥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걸 잘 알고 있었다.
울타리 없는 열다섯 살 소녀에게 세상은 얼마나 가혹했던가.
나이가 곱절은 많은 사내에게 후처로 팔려가듯 시집을 갈 뻔했던 걸 막은 것도 클라인이었고, 몰래 그녀를 후원한 것도, 겨우 신전에서 일 할 수 있게 도운 것도 전부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라니.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뺨을 후려치고 머리채를 쥐는 아버지라니.
“아버지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전 사실 아버지 얼굴도 몰랐죠.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나타나셨어요.”
레브리안은 불안한지 연신 작은 손을 말아 쥐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시곤 며칠을 술만 드시고 우울해하시더니 전부 제 잘못이라고 하셨죠.”
그 순간 검은색이 돌 만큼 혈색이 좋지 않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술이 깨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셨어요.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냈을 테니 이제 아버지께서 돌봐주시겠다는 말도 하시고요.”
“뭐?”
놀란 클라인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아버지라고 했다는 거니? 돌봐주겠다니, 그래서 지금 같이 집에 있다는 말이야?”
“네.”
“무슨 근거로, 아니 아버지라는 걸 어찌 믿으란 것이냐?”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도 모른 채 클라인이 물었다.
“아버지가 맞아요.”
“그건 어찌 아니, 아버지를 본 적도 없다고 했으면서.”
“어머니에 관한 걸 전부 알고 계셨어요. 아버지가 아니면 알 수 없었을…… 그런 것들을요.”
레브리안이 입술을 굳게 모으며 대답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레브리안도 아버지에 대해 알아보려 노력했을 터였다.
그 부분을 더 깊게 묻는 것은 어쩐지 실례가 될 것 같아 클라인은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무거워진 마음을 애써 진정하며, 클라인이 다시 물었다.
“그래…… 좋아, 그런데…… 아버지께서 조금 전에 왜 그렇게 난폭하게 구는 거지? 단순히 술 때문이라고 하기엔…….”
“많은 빚을 지셨다고 했어요. 빚 때문에 원래 살던 곳에서 도망치듯 이곳에 오셨다고요.”
“…….”
갈수록 태산이었다.
클라인은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레브리안은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는지 한참을 주저했다.
“레브리안.”
“……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얼마든지 돕겠다. 그러니 전부 얘기해보렴.”
“신관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언제나 탐스럽다고 생각했던 붉은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그녀를 따라 클라인의 입술도 열리었을 때였다.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는 말이 레브리안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결혼해야 한대요, 저.”
클라인은 태어나 처음 알게 된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얼어 버렸다.
“결혼이라니.”
반대로 레브리안은 어느 정도 체념한 듯 그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빚이 너무 많아서 혼자선 도저히 감당하실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게도 물론 아버지께 드릴 수 있을 만큼의 돈은 없고요.”
레브리안은 나름 논리적으로 이야길 풀어가려는 눈치였지만, 클라인의 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을까 봐 사제복 위에 올린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계속 이야기해 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