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끼익, 쾅.
어깨를 축 늘어뜨린 레브리안이 종종 걷더니 찬찬히 돌아섰다. 문을 닫고 멈춰선 클라인 쪽은 차마 쳐다보지도 못한 채.
레브리안은 클라인이 얼마나 엄격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제실로 불러들일 정도라면 얼마나 크게 혼이 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지.’
이대로 쫓겨나는 것일까.
레브리안은 생각만으로도 괴로워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돈벌이를 잃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신전에서 일한다는 건 단순히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외로운 레브리안의 안식처였고, 그녀의 스승이자 인생의 멘토가 있는 곳…….
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몹시 괴롭고 무거워 견딜 수 없었다.
레브리안의 정수리를 한동안 바라보던 클라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혼내려는 것이 아니니 고개를 들어.”
“…….”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레브리안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엔 충분했다.
“앉거라.”
클라인은 레브리안을 지나쳐 사제실 한복판에 놓인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레브리안이 쭈뼛거리며 몸을 돌렸다. 신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고는 하나 조금 전 기억이 남아 있는 탓이다.
그녀는 진녹색 치마를 접으며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말없이 마주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그녀는 온종일 종달새처럼 떠들어대지 않던가.
천방지축에 왈가닥. 누구에게나 활기찬 미소를 보이고 조심성이라곤 없는 여인.
그러나 사실 그 누구보다도 깊은 아픔 속에 묻혀 있는 여인이었다.
‘레브리안, 생각해 보니 네가 있는 곳은 언제나 시끄럽고 요란하구나. 그래, 그 날도…… 오늘과 비슷했지.’
레브리안를 처음 마주했던 순간이 여전히 선명하였다.
클라인을 무릎 꿇게 하고 울게 하며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건, 사실 여리고 순수한 소녀에게 내밀었던 제 손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 * *
“신관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아이, 이렇게 우기면 안 된다니까!”
“한번만요, 딱 한 번이면 돼요!”
오후 수업을 마치고 사제실로 향하던 클라인의 발길을 붙잡은 건,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시종과 어느 소녀였다.
소녀는 클라인을 보자마자 저를 막던 시종을 밀치곤 달려왔다.
“신관님, 클라인 이온 신관님이 맞으시죠?”
저를 어찌 아느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소녀가 클라인의 사제복을 쥐며 소리쳤다.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답고 귀한 얼굴이라고 들었거든요, 신관님이 틀림없으시죠?”
“아니, 너 당장 그 손 놓지 못하겠니!”
그사이 달려온 시종이 소녀를 떼어내며 클라인에게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당장 끌어…….”
“아닙니다, 그냥 두세요.”
“예?”
클라인의 말에 시종이 스르르 손에 힘을 풀었다. 소녀는 입술을 한번 굳게 물더니 구겨진 제 소맷자락을 털었다.
이 잘생긴 신관이 저를 내치지 않아 몹시 만족한 듯한 얼굴이었다.
소녀가 콧구멍에서 뜨듯한 김을 한번 뿜었을 때, 클라인이 시종에게 말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가보세요.”
“하지만.”
클라인은 두 번 말하지 않고 허리를 숙이더니 소녀에게 눈을 맞춰주었다.
“아이참…… 아직 정식으로 임관받으신 것도 아닌데 자꾸 저러면 혼이 나실 텐데.”
시종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소녀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넘기더니 입을 열었다.
“클라인 신관님, 신관님이 맞으신 거죠?”
“그래, 내가 클라인 이온이란다.”
“신관님께선 신분이 낮고 귀하고를 떠나…… 누구에게나 기도를 해주신다던데 사실인가요?”
신관이 된 지 아직 두어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일대에서 클라인은 이미 유명했다.
아니, 사실 그는 신관이 되기 전부터 무척 유명했다.
아름다운 회갈색 머리에 심연을 꿰뚫는 듯한 청색 눈동자. 늘 말없이 닫혀 있던 입술이 어쩌다 열릴 때면 울림 좋은 목소리가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곤 했으니까.
유서 깊고 명망 있는 공작가의 아들다운 몸가짐과 반듯한 생활로도 유명했다.
사제가 되기 전까진 모든 여인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 맞다.”
소녀는 입가에 번지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제가 부탁을 드리면, 저희 어머니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실 수 있나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클라인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와아, 정말요?”
클라인 이온은 한쪽 무릎을 굽혀 소녀와 눈을 마주치며 다정히 목소리를 내었다.
“레이디,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레브리안 루즐이에요. 올해로 열다섯이고요.”
그제야 소녀와 눈을 마주친 클라인의 눈썹이 슬쩍 하늘로 향하였다 떨어진다.
잘 빗질해 주고 관리했다면 아마 눈이 부실만큼 황홀한 빛을 낼 백금발 머리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머리칼은 귀족 중에서도 보기 드물었다.
게다가 희고 고운 피부에 정점을 찍는 푸른 눈동자는 소녀의 천진함과 몹시 잘 어울렸다.
“좋아, 레브리안. 어머니를 위해 내가 어떤 기도를 올리면 좋겠니?”
클라인의 물음에 레브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를 내었다.
“어머니의 영혼에 축복을 내려주세요.”
“……어머니의 영혼?”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어요. 저 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일하셨죠. 처음으로 일을 쉬고 누우셨는데, 일어나지 못하셨어요.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바다를 뚝 떠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에 물이 차고 있다.
클라인의 얼굴 근육이 묘하게 변하는 걸 눈치챈 소녀가 재빨리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괜찮아.”
클라인은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위로했다.
별말 없이 그녀의 이야길 들어주는 것만으로, 레브리안은 불안했던 가슴이 평온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책이라니?”
“당장 내일 아침 먹을 것도 없는 걸 뻔히 알면서.”
“…….”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고 졸랐어요. 몇 달이 걸려도 좋으니 꼭 구해달라고요.”
“그랬구나.”
“바보 같았어요. 어머니 말씀처럼 책을 읽는 일에 관심을 두지 말았어야 했어요.”
“…….”
“신관님, 저에 대한 건 전부 잊으시고 어머니께서 부디 평안하시길 빌어주세요. 라힐라 님(저승의 신)의 보살핌 속에서 아주 오래오래 행복 하시길요.”
클라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복잡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입을 굳게 물었지만, 그것이 또 소녀를 슬프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곤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꼭 그리 기도해주마.”
“정말이세요?”
“그럼.”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레브리안, 읽고 싶었던 책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고대 철학사와 훌 제국 신화요. 사실 신화는 앞부분을 조금 읽다 말았거든요.”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의외의 단어였지만, 클라인은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마침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구나. 빌려줄 테니 대신, 다 읽고 나면 돌려주겠니?”
클라인의 말에,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며 반문했다.
“……정말이세요?”
“그럼, 물론이지.”
그녀는 작고 마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슬픔이 전부 가시지 않은 얼굴 위에 즐거움이 희미하게 피었다.
그것은 곧 클라인의 기쁨이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신관님.”
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신전에는 그가 평생을 바쳐도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책이 많았으니까.
책을 빌미로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클라인은 지금 제 가슴 속에 피어난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하였다.
그녀가 어머니란 울타리 없이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신관님.”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따금 만나 책을 건네고 그녀를 위한 기도를 올리며 소녀가 여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레브리안이 스무 살이 되던 해, 클라인은 그녀를 신전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신관님!”
“레브리안.”
“레비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레비라고 부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레브리안.”
“싫어요, 레비라고 불러줘요.”
“아니, 레브리안은 레브리안이지 레비가 아냐.”
“쳇…… 그 이름은 남자아이 이름 같아서 싫은걸요.”
클라인에게 이런 투정 어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오직 레브리안뿐이었다.
클라인은 레브리안의 영민함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꾸밈없는 머리에 늘 허름한 옷을 입어야 했으나 그녀의 가슴 속에는 빛나는 꿈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보다 행복해질 만하다는 것을 알았다.
매번 귀찮게 한다는 명목으로 수수께끼를 주며 내보내곤 했지만, 그것은 사실 클라인에게 기쁨이기도 했다.
클라인은 오직, 자신만이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만남을 지속할 수 있었다.
오히려 레브리안이 그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멈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