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레브리안, 그년 빨리 나오라고 하라고!”
사내의 음성이 송곳처럼 날아와 클라인에게 박혔다.
‘레브리안?’
클라인은 곧장 고개를 돌려 사내를 응시했다.
취기 때문인지, 흥분한 탓인지 이마까지 새빨개진 사내는 살벌한 눈빛으로 연신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당장 나오라고! 레브리안!”
“진정하세요, 레브리안은 지금…….”
“시끄러워! 그년 오라고 해!”
클라인은 어디로 가려던 것인지조차 잊고 사내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바짝 말아쥔 주먹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해요!”
클라인이 복도를 절반쯤 걸어갔을 때였다. 누군가 부른 것인지 멀리서 레브리안이 달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레브리안은 사내의 팔뚝을 잡고 다급히 밖으로 끌었다. 그러나 레브리안을 본 사내는 이제 시작이라는 듯 비릿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호라, 정말 여기 있었네?”
사내는 레브리안을 아래위로 훑더니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렇게 호화로운 신전에서 일하면서 돈 한 푼 안 내놓는다 이거지?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뭐라고요?”
“네년이 돈 내놓을 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테니 그렇게 알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래요! 당장 꺼져요,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레브리안이 살기등등한 목소리를 내었을 때였다. 사내의 눈빛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레브리안의 뺨을 걷어 올렸다.
“아악!”
그러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쓰러진 레브리안의 머리채를 쥐었다.
“이년이 지금 어디서!”
그때였다. 다급히 달려온 클라인이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을 움켜잡았다.
“그만! 지금 무슨 짓입니까!”
“뭐야, 넌!”
클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내의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손목이 으스러질 것처럼 강력한 힘이었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레브리안의 머리를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계속했다간 정말 손목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일었던 탓이다.
“젠장!”
그는 번뜩이는 눈으로 클라인을 올려다보았다. 손목에 시큰한 기운이 밀려오더니 점점 통증으로 바뀌었다.
‘빌어먹을.’
마치 수십 개의 바늘로 동시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반듯하고 고고한 사제는 분명 인간이었지만, 표현하기 힘든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사내가 레브리안의 머리채를 놓자 클라인도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성스러운 신전에서 부린 행패는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당장 나가십시오.”
“끼지 마쇼. 나…… 난, 레브리안과 할 얘기가 있어.”
사내는 손목을 두어 번 돌리더니 처음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험하고 거칠게 살아왔다. 본능적으로 저보다 강한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클라인이 입을 열었다.
“……레브리안.”
“…….”
“이자와 할 말이 있느냐.”
바닥에 주저앉은 레브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보고 있지 않지만, 클라인의 눈에 레브리안의 얼굴이 선하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선 마른 어깨를 잘게 떨고 있겠지.
그 모습을 보면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아 클라인은 일부러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할 말이 없다는군요. 돌아가세요.”
“야, 레브리안!”
“돌아가세요.”
클라인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두려울 것 없다는 듯 날뛰던 사내는 입 안쪽 살을 짓씹으며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레브리안을 한동안 노려보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너 저녁에 보자.”
그는 클라인을 한 번 힐긋거리곤 신전을 빠져나갔다.
“…….”
“다들 돌아가서 일 보세요.”
클라인의 한마디에 모여 있던 신관들과 시종들이 전부 흩어졌다.
움직이지 않은 이는, 아니 움직일 수 없는 건 오직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레브리안뿐이었다.
“…….”
클라인은 말없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녀 앞에 앉았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흘러내린 탓에 레브리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레브리안.”
공포와 수치심, 모멸감이 뒤섞여 레브리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홀로 제 마음을 수습하도록 둬야 할까, 아니면 그녀를 옭아매는 구렁텅이에서 끌어내야 할까.
“일어날 수 있겠니?”
클라인은 그녀를 끌어내기로 했다.
공포는 밀어내고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수치심은 닦아낼 수 있도록 손을 내밀 것이다.
“네.”
다행히 레브리안은 그가 내민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흘러내린 제 머리를 추어올리곤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죄송해요, 신관님.”
단단하게 굳은 클라인의 미간을 힐긋거린 레브리안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클라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정말 끔찍하게 수치스러웠다.
제발 절 내버려 두고 가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조금 나을까 싶어 입술을 당겼으나 형편없는 표정만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가세요, 신관님…… 제발요.’
그러나 클라인의 관심사는 오직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행여 몸이라도 상할까, 조금 전 사내에게 맞은 곳이 괜찮은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사내가 누구인지 그녀와 무슨 관계인지는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레브리안이 창백한 얼굴을 들자 붉게 달아오른 오른쪽 뺨 아래, 얼핏 손톱에 긁힌 듯한 자국이 보였다.
“……이런.”
최대한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려 했으나 얼굴에 난 상처는 클라인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레브리안.”
그러나 클라인이 손을 대려 하자 레브리안이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가슴이 몹시 불쾌하게 뛰었다. 레브리안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끝에 닿으려다 멀어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라인이 답답한 숨을 토하며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일어날 수 있겠니.”
“네, 저 그만 일하러 갈게요.”
레브리안은 진녹색 치마를 한 번 훌훌 털어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흐트러진 머리를 대강 정리하며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의 제스처다.
클라인은 그녀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보는 눈이 많았다. 주변이 텅 비었다고 해서 아무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따라오거라.”
“…….”
“신관에서 소란을 피웠으니 그냥 넘어갈 순 없다.”
클라인은 일부러 단호한 음성을 내었다.
하지만 레브리안의 침울한 얼굴에 이런 목소리를 뿌리는 건, 아무리 거짓일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