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러다 고통이 서서히 쾌락으로 변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녀의 비명이 천천히 신음으로 바뀌었을 때.
신음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사내의 움직임도 따라 거칠어지고 있었다.
“레비…….”
사내가 여인의 귓불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밭은 호흡에 섞인 목소리가 제법 끈적하게 귀에 감긴다.
마치 여인의 배를 뚫고 나갈 것처럼 격렬하게 치고 올라오던 것이 뜨거워지더니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경련하듯 떨던 사내의 육체가 여인의 위로 쏟아진다.
그가 내뱉은 공기에 질식된 것은 침대 위에 쓰러진 여인이었다.
여인은 이마에 들러붙은 금발을 손등으로 대충 쓸어 올린다. 말갛게 빛나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구가 다시 피었다.
“그대는 정말이지…….”
상냥하고 다정한 아름다운 나의 여인.
그 순간 사내의 입꼬리가 묘한 호선을 그려냈다.
“신관님.”
황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사내가 여인의 입술에 은근한 자국을 남긴다.
순간 장면이 바뀌며 눈을 뜨자, 온통 새카맣기만 한 제 방 천장이 단숨에 눈에 들어왔다.
“하아, 하아…….”
그녀의 의식이, 희뿌연 장막처럼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꿈이었다.
끔찍하리만치 현실적인 꿈.
레브리안은 여전히 거친 제 호흡을 고르며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꿈이라기엔 몹시 생생했다. 호흡을 고른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이것이 정말 꿈이었는지는 여러 번 확인했다.
“꿈이었어.”
레브리안은 평소 누우면 바로 기절하는 것처럼 쉽게 잠이 드는 데다 좀처럼 꿈을 꾸지 않았다.
이렇게 생생한 꿈을 꾼 것은 아주 어린 시절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이마와 등에 땀이 났었는데.”
레브리안은 잔뜩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실제로 남자의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축축해진 아랫도리였다.
“어쩌지.”
단순히 음부만 습해진 게 아니라 속옷까지 홀딱 젖고 말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지만, 민망함을 견딜 수 없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므로 달아난 잠을 서둘러 잡아야 했는데 모든 것이 문제였다.
자꾸 맴도는 클라인의 얼굴이, 젖어버린 자신의 음부가, 그리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황홀했던 기억이 그리워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신관님께 이런 불순한 마음을 품다니. 이런 끔찍한 꿈을 꾸다니.’
레브리안은 제 뺨을 여러 번 두드렸다.
‘용서하세요, 신관님. 아니, 불순한 소녀를 용서하지 마세요.’
그녀의 마음 또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불경스러운 일임을 알기에 더더욱.
그는 신의 아들이다.
인간인 그녀와, 그것도 미천하기 짝이 없는 신분의 그녀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만약 클라인이 신관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신과는 절대 맺어질 수 없음을 알았다.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분이야. 나 같은 잡부를 어여삐 여기신다고 해서 그분과 친하다고 생각해선 안 돼.
‘바보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불손하기 짝이 없구나, 레비.’
레브리안은 그렇게 한참을 침대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 * *
클라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업무를 마치고 기도를 올렸다.
무탈하고 평안한 하루를 만들어 줄 것을 간곡히.
“안녕하세요, 신관님.”
기도실에서 나왔을 때 클라인은 걸레로 복도를 문질러 닦는 시종들과 인사를 나눴다.
클라인은 다른 사제들처럼 그들을 멸시하거나 거리를 두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루스.”
인사를 건네며 클라인은 저도 모르게 시종들의 뒤를 살폈다.
그들은 눈치껏 클라인이 레브리안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이고 오늘은 눈치껏 사원을 청소하겠다고 나서더라고요. 매번 신관님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더니, 드디어 철이 들었나?”
제 키만 한 빗자루로 비질을 하던 루스가 넉살 좋은 목소리를 냈다.
루스의 중얼거림에 클라인이 말 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러자 젊은 신관의 눈치를 살피던 루스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중요한 일 하시느라 바쁘신 분을 그만 방해해야 한다는 걸 저도 깨달았겠지요.”
고작 시종의 인사말이라 생각하고 넘기기엔 뼈가 있었다.
영민한 클라인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수고하세요, 루스.”
“네, 신관님.”
복도를 돌아 대신전으로 향하는 클라인은 코가 빠진 얼굴이었다.
그의 눈빛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사제복을 끌며 얼마간 걸었을 때 루스가 긴 숨을 토해냈다.
“에이그. 너무 정이 많으셔서 탈이야.”
루스는 클라인의 뒷모습을 살피다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태연하게 낯을 바꾸곤 비질을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매끈한 마룻바닥을 경쾌하게 울리고 있을 때였다.
“당장 나오라고 해, 당장!”
평화롭던 신전에 사내의 고성이 왕왕 울렸다.
청소하던 시종들도, 나란히 서서 기도원으로 들어가던 사제들의 움직임도 전부 멈추게 하는 괴성이었다.
복도 끝에서 사원으로 향하던 클라인도 걸음을 뚝 멈추고 돌아섰다.
정문 근처에서 신관들이 모여선 누군가와 실랑이 중이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제 중 하나가 사내를 저지하러 나섰다. 그러나 사내의 팔을 쥐는 순간, 사제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붉게 충혈된 눈과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 비틀거리던 사내는 사제가 제 팔을 잡자 거세게 뿌리치며 악을 질렀다.
“놔! 만날 사람 있어서 왔다니까, 왜 이래!”
“조용히 하세요, 신전에는 취객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내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그년 당장 나오라고 해.”
“이 보세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영 생소한 광경도 아니었다.
불길한 신탁을 받거나 갑작스레 가족을 잃었을 때, 종종 사람들에겐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신에게 낼 수 없는 화는 당연히 신관에게 향하였다.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란 곧 신과 같은 존재라는 걸 분노에 눈이 먼 인간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꽤 시끄럽겠군.’
어차피 그가 나선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적당히 화풀이하다 시간이 지나면 제풀에 지쳐 돌아가겠지.
대신관 역시 민간인에게 엄격한 편은 아니었다.
클라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려 했다.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기 전까진.
“레브리안, 그년 빨리 나오라고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