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라비엘리의 방에서 나온 직후 루시안은 1층으로 향했다.
무감각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루시안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전히 손바닥에 남은 그녀의 온기를 지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간직하기 위한 것인지는 루시안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가지, 라비엘리와 나눈 대화는 그의 몸 여기저기에 남아 루시안의 감정을 미묘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부러 투박한 걸음 소리로 흔적을 지운 루시안이 1층으로 내려갔을 때, 1층은 평소와 다르게 텅 비어 있었다.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1층으로 내려가자 카운터에서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로제가 벌떡 허리를 세웠다.
“아뇨, 그보다.”
루시안은 정제된 미소를 지으며 로제를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가 아주 훌륭하더군요. 고마워요.”
“어머,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양고기는 두 분께만 특별히 올린 것이랍니다.”
로제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히히 웃었지만 루시안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미소에 화답하지는 않았다.
어딘가 머쓱한 기분이 된 로제가 다시 입꼬리를 정돈하자 루시안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조금 전 아내에게 들으니 아침에 병사들이 다녀갔다면서요.”
“아, 네. 이아신스 부인께 들으셨군요.”
분명히 아내에게 들었다고 했는데, 로제는 처음 있는 일인 양 루시안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워낙 말하기 좋아하는 성미인 데다 이런 일로라도 관심을 받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한동안 로제의 수다를 들어주던 루시안은 적당한 지점을 찾아 그녀의 말을 끊었다.
만약 그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로제는 아마 하루건 반나절이건 멈추지 않고 주절댈 것만 같았다.
“그랬군요. 병사들이 인근을 수색하는 모양이죠?”
“네, 하지만 누군가를 해쳤다면 근처에 머물겠어요? 당연히 달아났겠지. 안 그런가요?”
“그렇겠네요.”
“어젯밤에 죽은 것 같다고 하니 진작 도망쳤어도 한참을 도망갔겠죠. 이 얘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듣지 않을 게 사실 뻔하잖아요. 괜히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참았답니다. 그리고…….”
로제가 병사들의 수사 방식부터가 틀렸다면서 다시 길고 긴말을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루시안이 손을 들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로제.”
“네.”
로제를 불렀을 때까지만 해도, 아니 그녀가 상냥하게 대답하기 전까지만 해도 루시안은 고민했다.
라비엘리의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계획했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마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라비엘리는 제게 더욱더 의지할 것이다.
그리고 라비엘리가 쌓아 올린 벽 역시 조금씩 허물어질 것이다.
처음부터 이걸 원했잖아.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 거지?
루시안은 제 내면의 소리를 지워버리며 입술을 열었다.
“어제 몰리와 밖에 나갔을 때, 수상한 총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루시안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듯 차분히 말했으나, 로제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하였다.
“수상한 총소리를 들었다고요?”
“사냥터 근처니 총소리를 듣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긴 하죠. 그런데 그전에 좀 이상한 사내들을 마주쳤거든요.”
루시안은 카운터에 슬그머니 팔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사내라고요?”
로제는 눈앞의 사내가 중요한 목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경직된 얼굴이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병사들에게 하고 싶은데, 혹시 로제가 그 사람들을 좀 불러다 줄 수 있을까요?”
* * *
집사 메이든은 오랜 시간 마이어가를 위해 일해왔다. 그는 말수가 적은 데다 사교적인 성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밀스러운 후작을 저택을 관리하는 데 적임자였다.
좀처럼 성을 내지도,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었다. 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굴어 가까이 지내는 자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주인에게서 온 편지가 메이든의 심기를 몹시 거슬리게 했다.
“에레타.”
집사는 건조한 낯으로 하녀장 에레타를 부르더니 종이봉투를 건넸다.
에레타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아낸 뒤 봉투를 건네받자 집사가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하녀장에게 전하라고 하시더군.”
집사가 건넨 것은 테아노의 서신이었다.
“제게요?”
메이든은 아마도 저택 내의 사정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집사인 제가 아닌 하녀장에게 물었다는 건 어딘가 불쾌한 일이었다.
“안의 내용은 확인하지 않았으니 직접 보고 처리해.”
그 말을 끝으로 집사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 때문이시지?’
오전 내내 응접실 바닥을 쓸고 닦던 에레타는 봉투 겉면을 슬쩍 확인하고는 곧바로 열어보았다.
안에 든 것은 얇고 보들보들한 종이였는데, 훌륭한 품질의 잉크를 썼는지 조금도 번지지 않고 글자 모양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에레타 역시 오랫동안 마이어가를 위해 일해왔다.
그녀는 다소 예민하고 날카로운 탓에 같이 일하는 이들에게는 불편한 상대였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철두철미하고 고지식한 면모 덕분에 하녀장이 되었는데 이것은 에레타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밖에서 알려진 테아노와 실제 그의 모습이 다르다는 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건 사실 에레타의 공이 컸다.
그녀가 틈틈이 입단속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소문은 진작 발을 달고 수도까지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 이유 등으로 주인이 저를 믿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 진료를 간 상황에서 서신을 보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시지?’
어쩐지 불안한 마음으로 봉투를 열어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있었다.
‘라비엘리 르휜.’
에레타는 화들짝 놀라 서신을 그대로 반으로 접었다.
그녀가 이토록 놀라는 이유는, 라비엘리가 얼마 전 테아노 후작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와 험준한 산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를 어쩐다.’
에레타는 사실 라비엘리의 안위가 그리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작이 분노한 이후의 상황은 두려웠다.
그녀는 서신을 봉투에 다시 욱여넣듯 집어넣고는 위층에서 청소를 하고 있을 메이지를 찾아 나섰다.
“메이지, 메이지!”
메이지는 주인 없는 방을 이틀에 한 번꼴로 쓸고 닦고 있었다.
“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메이지가 몸을 일으켰다. 재빠르게 대답은 했지만, 행동은 미적거렸다.
에레타가 저를 이런 목소리로 부른다는 건, 그리 썩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내려와, 지금.”
“네, 내려가요.”
걸레를 움켜쥔 채 계단을 내려가자 에레타가 불편함을 미간에 잔뜩 머금고 서 있었다.
“부르셨어요?”
“메이지, 주인님께서.”
에레타는 말하다 말고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듣는 이들이라고 해봐야 하녀나 하인들이었지만 말이다.
“아가씨는 잘 지내시는지 물으셔.”
“네?”
메이지는 들고 있던 걸레를 떨어뜨릴 뻔하였다.
라비엘리가 루시안과 함께 갈라테이아로 떠난 뒤, 메이지는 매일 불안에 떨고 있었다.
후작이 금방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이 유일한 위안거리였으나, 갑작스레 일정이 변경되어 들이닥칠지도 몰랐다.
하루 이틀, 초조함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가씨만 혼자 보낼 수 없다며 어떻게든 따라갔어야 했던 걸까.
메이지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먹은 표정으로 서 있자, 에레타가 다시 말했다.
“오늘 안에 답신을 보내야 해.”
“어떻게 해야 하죠?”
“아가씨께서 그분…… 그러니까 후작님의 아드님과 함께 말을 길들이러 가셨다고 말씀을 드리든가, 아니면 집에 잘 계신다고 거짓말을 하든가.”
“…….”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가씨께서 저택을 떠났다는 사실을 주인님께서 아시면.”
그들은 테아노 후작이 라비엘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테아노는 떠나기 전 메이지에게 이상한 명을 내렸다.
‘매일 밤 루시안이 네 주인의 방을 찾을 것이다. 두 사람이 무얼 하는지 잘 지켜보고 내게 빠짐없이 보고하거라. 문틈으로 혹시 신음이 새는지, 내 아들이 라비엘리의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를 말이다. 알겠느냐?’
두 사람이 없는 데다 먼 곳에 있으니 돌아온 직후 대충 별일 없었다고 보고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아노가 라비엘리의 부정을 의심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 와중에 두 사람이 함께 갈라테이아로 떠났다는 말을 한다면, 테아노는 크게 분노할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죠? 모두들 입단속 시키고 주의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에레타의 생각은 달랐다.
“주인님께서 그전에 사람을 보내시거나 갑자기 오시면?”
“그건…….”
“아가씨를 위해 한 행동이 더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
에레타의 말에 메이지는 금방이라도 울 것같이 위태로운 얼굴이 되었다.
메이지를 빤히 보던 에레타는 서신을 다시 펼쳐 들며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어.”
“두 분이 함께 갈라테이아로 가셨다고요?”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지?”
“7일이요.”
“그전에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고.”
메이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후작의 아들이라는 자 역시 믿을만한지 아닌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