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28)화 (28/136)

28화

“아뇨, 괜찮아요.”

라비엘리는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이미 이불 속에 숨겨진 두 다리를 안으로 바짝 붙이며 시선을 돌렸다.

루시안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간밤의 기억도 그를 따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내가 한번 보죠.”

“아니…….”

라비엘리가 이불을 움켜쥐자 루시안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이마와 볼에 닿는 지긋한 시선이 뜨겁게 느껴진다.

“하룻밤 새 내가 의사라는 걸 잊었습니까?”

“괜찮아서 그래요.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약초를 넣고 붕대를 감았으니 다시 한번 갈아줘야 해요. 그대로 둔다면 썩을지도 모릅니다.”

“…….”

“그럼 구제할 방법은 자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물론 썩는다는 건 다소 과장된 말이었다.

“자르다니요?”

“말 그대로요.”

“설마 제 발을요?”

“뭐, 쓸 수 없는 부분을 잘라낸다고 하면 더 듣기 좋으려나.”

“비약이 지나치군요.”

라비엘리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혼자 말을 타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말 위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저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온전히 저 혼자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 알았다면, 자유도 해방감도 전부 포기했을 것이다.

라비엘리는 결국 체념한 얼굴로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자 루시안은 느긋하게 웃으며 그녀의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예민하고 겁이 많은 여인이긴 했으나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어제보다 좋네요. 붓기가 많이 가라앉았어요. 하지만 당분간은 걷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지나간 이야기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 라비엘리가 제 발끝을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할 것 같나요?”

“적어도 일주일.”

“일주일은 너무 길어요.”

라비엘리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지만-

“너무 길어도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이 제대로 걷지를 못하는걸.”

루시안의 말이 맞았다.

“조금 전 로제가 다녀갔어요.”

아무래도 루시안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로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미 병사들에게 어젯밤 피투성이가 된 채 올라온 사람들이 있다는 걸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네요.”

루시안은 테이블 위에 있는 아침 식사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침부터 구운 양고기가 올라온 걸 보니 로제가 제법 신경을 쓴 듯하다. 간밤에 건넨 크랜의 힘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침에 병사들이 왔다 갔대요.”

“그렇군요.”

루시안은 이번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무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라비엘리는 왈칵 화가 치밀었다.

“그렇군요라니. 병사들이 왜 온 건지 모르겠어요?”

“어제 산에서 사람이 죽어서겠죠.”

“…….”

태연한 목소리에 라비엘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치 남의 얘기 하듯 말하는군요.”

루시안은 이번에도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릴 뿐, 라비엘리를 처치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마른 약초에선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이 향기가 이따금 테아노에게서 풍기던 것이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고 불쾌함이 밀물처럼 밀려왔으나 여기 처음 왔을 때처럼 공황 상태에 빠질 만큼은 아니었다.

그사이 루시안은 로제가 가져다 놓은 따뜻한 물을 들고 왔다.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셔 가볍게 물기를 짜내자 수건에서 연기가 폴폴 피어올랐다.

라비엘리의 발목에 감겨있던 붕대를 천천히 풀며 루시안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까.”

“병사들이 오지 않았다면 지난 일이었겠죠.”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는지 라비엘리는 두 팔로 저를 감싸 안았다.

루시안은 따뜻한 수건을 라비엘리의 발목에 대며 나른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요. 총소리가 두 번이나 났잖아요. 만약 누가 봤으면요?”

“총소리를 듣고 달려올 만큼 한가한 사람은 거기에 없었을 겁니다.”

“말도 안 돼. 당신은 지금 너무.”

“라비엘리, 이미 지난 일이에요.”

“지난 일이 아니에요. 어제 벌어진 일이라고요. 그리고 지금…… 범인을 찾고 있잖아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문가를 다시 한번 힐긋거렸다.

굳게 닫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로제가 아니고는 들어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문가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루시안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심드렁하게 되묻더니, 혼잣말처럼 한마디를 더 흘렸다.

그의 말에 기막힌 건 라비엘리였다.

“뭐라고요? 만약 현장에서 증거라도 발견하면요?”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고는 미리 만들어온 연고를 꺼내 들었다.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 더 진정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어야 했는데.”

“냉정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당신이 총을 쏘는 걸 어떻게든 막았겠지.”

라비엘리가 이번에도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루시안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길래 구해줬더니, 이제 나를 원망하는 겁니까?”

“아예 죽일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그럼?”

“보니까 제법 실력이 좋은 것 같던데 경고 사격 정도만 했어도 좋았잖아요. 쫓아만 냈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정말 죽여버리다니.”

라비엘리가 낮게 읊조리자 루시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한쪽으로 살포시 기울이며 입술을 들었다.

“이봐요, 라비엘리 르휜.”

“…….”

“거기서 그자를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을 겁니다.”

전에 없는 서늘한 음성이었다.

라비엘리는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서글서글한 미소로 여유를 가장하지만 사실 속내는 테아노만큼이나 무서운 자라는 걸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하지만.”

“그쪽은 둘이고 나는 하나인데, 자칫 머뭇거렸다간 그들이 쏜 총에 내가 맞았을 겁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그러더니 루시안이 갑자기 움직임을 뚝 멈추고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달라진 눈빛에 시선을 피하려 하자 그의 검질긴 음성이 라비엘리를 붙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어차피 총을 쏜 건 난데 왜 당신이 두려워하죠?”

“…….”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같이 있었으니까, 이 단순하고 명쾌한 단어를 꺼내기만 하면 되는데 라비엘리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를 걱정하는 겁니까? 손을 그렇게 부들부들 떨 만큼?”

“아뇨, 공범으로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단지 그것뿐이에요.”

“라비엘리, 그거 알아요?”

루시안이 연고를 발목에 바르며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면 코가 빨개져.”

“뭐라고요?”

당황한 라비엘리가 한 손으로 제 코를 움켜쥐자, 루시안은 웃음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 것 같습니까?”

“…….”

“지켜보면서 차차 알아봐요.”

마지막 목소리는 몹시 위험하게 들려왔다.

마치 물속에서 저를 끌어당기는 듯 축축하게 젖은 음성이 그녀의 발목을 감는다.

라비엘리는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제 모습에 무력감을 느꼈다.

“다 됐나요?”

“네, 처치는 끝났습니다.”

루시안은 경쾌하게 대답하고는 새로 가져온 붕대로 발목을 감쌌다.

팽팽하게 조여드는 감각이 불편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어쩐지 그녀를 일탈하지 않게 잡아주는 것처럼 느껴진 탓일까.

사내의 정제된 손놀림을 지켜보는 건 어딘가 모르게 중독성이 있었다.

루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붕대를 감았는데, 빠른 듯 느릿했으며 조금의 구김도 허락하지 않는 듯 꼼꼼하게 발목을 감쌌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러고는 음식이 올려진 테이블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선 라비엘리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가져다주었다.

“오늘 아침은 꽤 훌륭하네요.”

라비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루시안이 다시 말했다.

“입맛 없다며 어리광부릴 생각하지 말고 먹어요.”

그는 수프를 라비엘리가 앉은 자리 가까이에 놓아 주고는 숟가락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서.”

“조금 있다가 먹을게요.”

“지금 먹어요. 식으면 더 먹기 힘들 테니까.”

“…….”

“먹어야 도망갈 힘이 생길 거 아닙니까.”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눈에 힘을 주며 그를 노려보았다.

“웃어요. 농담이었어요.”

“…….”

“농담에도 웃지를 않으니, 어떻게 해야 당신 기분이 좋아질까.”

루시안이 창문을 내다보며 작위적인 한숨을 쉬자 라비엘리가 서늘하게 대꾸했다.

“지금 나가준다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네요.”

“그렇다면 기꺼이.”

루시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신사답게 예를 갖추는 시늉을 했다. 라비엘리는 받아주지 않았으나 루시안은 나른히 한 번 웃어 보인 뒤 방을 빠져나갔다.

탁-

그가 나간 직후 라비엘리는 억지로 받아든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어쩐지 수프를 떠먹을 힘도, 먹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