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라비엘리가 눈을 떴을 때, 아침 볕이 머리칼을 간질이고 있었다.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서려 했으나 생각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라비엘리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뒤 제 발목을 감싼 붕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천천히 발목을 비틀자 통증이 느껴졌으나 어제만큼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좋네.’
이 정도 통증이라면 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머무를 수는 없다. 태후의 병증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병상에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후작이 오스트린에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 루시안과 더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단순히 후작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다른 이유도 물론 있었다.
라비엘리는 간밤에 꾼 꿈이 두려웠다.
무섭고 겁이 났다.
끔찍한 꿈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제 몸 어딘가에 그의 웃음이 남아 있을까 봐 불안했다.
그런 꿈을 꾸었다는 걸 들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루시안을 마주하는 것이 걱정되었다.
‘어떻게든 빨리 회복해서 돌아가야 해.’
그런 생각 끝에 라비엘리가 조심스레 두 다리를 땅에 내려놓은 뒤 힘을 주었을 때였다.
“아.”
발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통증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참는다고 해서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리를 다친 채로 말을 길들이는 것도, 사냥을 하러 깊은 산속으로 가는 것도 무리였다.
라비엘리는 어쩐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았다.
아파서 움직일 수 없으니 돌아가자고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으니 돌아가자는 것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를 어쩌지.’
주저앉은 채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뒤에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로제였다.
“세상에, 부인.”
로제는 바닥에 앉아 있는 라비엘리를 보고 다소 놀란 듯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황급히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다는 말에도 로제는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설마 침대에서 떨어지신 거예요?”
“아뇨, 아니에요.”
라비엘리는 보란 듯이 일어서서 침대에 앉고 싶었지만, 생각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로제의 부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로제.”
“별말씀을요. 다친 곳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졌어요. 로제가 약초를 내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별것도 아닌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제는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걸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아침 식사가 조금 늦었지요? 죄송해요.”
로제는 테이블 위에 구운 양고기와 채소찜, 버섯 수프, 그리고 향이 좋은 차를 내려놓았다.
‘세상에, 구운 빵과 콩 몇 조각이 전부였는데.’
라비엘리는 확연히 달라진 대우가 꽤 당황스러웠다.
고작 25크랜을 건네었을 뿐인데.
“괜찮아요. 혼자 이 넓은 곳을 관리하는 걸 아는데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게 아니고 아침부터 병사들이 찾아와서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병사들이 찾아왔다는 말에 공연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설마 하는 마음에 라비엘리는 슬쩍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나요?”
라비엘리가 묻자 로제는 들고 온 쟁반을 팔에 끼우며 어깨를 들썩였다.
“갈라테이아 초입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었나 봐요.”
“……아.”
“아마 인근에 있는 여관은 여기가 유일하니 물어보러 온 모양이에요.”
로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말을 이었다.
“사냥터라 사람이 죽고 다치는 건 사실 흔한 일이지요. 산짐승한테 당했을 수도 있고 오발탄에 맞아 다치는 경우도 흔하지는 않아도 왕왕 있으니까요.”
라비엘리도 그녀의 표정을 따라 태연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불 속에 숨겨놓은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어쩌면 여기 묵었던 사람일 수도 있는데 인상착의만 들어서는 알 수 없었어요. 아니, 수염이 있는 사내가 한둘인가? 그리고 내가 여기 오가는 자들의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로제는 바쁜 오전에 병사들에게 시달린 게 억울했는지 불쑥 화를 냈다가 잠잠해졌다.
“그렇죠. 로제 말이 맞아요.”
라비엘리는 괜히 제게 불똥이 튈까 봐, 제 발목이 다치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것에 로제가 의문을 품을까 봐 최대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한 명은 머리에, 다른 한 명은 배에 구멍이 나서 즉사했다는데, 죽은 사람만 안됐죠. 누가 그랬는지 찾을 수는 없을 거예요.”
로제의 말에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보통 두 명 이상이 사냥을 가는데, 가는 길에 싸움이 나서 총으로 쏴버린 일도 종종 있거든요. 하여튼 사내들 성질머리란.”
“…….”
“여기 있으면서 웬만한 험한 꼴은 다 봤어요. 이러니 아무도 여기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지.”
“그, 그렇겠죠. 로제가 정말 고생이 많네요.”
“사람을 쓰려면 아마 돈을 곱절은 줘야 할 거예요. 어머, 제가 또 부인을 붙잡고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부인, 죄송해요. 차를 먼저 좀 드릴까요?”
그러고는 허둥대며 가져온 차를 따라 라비엘리에게 내밀었다.
“네, 고마워요.”
로제가 입을 다물자 방 안은 다시 적막해졌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물이 차기를 채우는 소리만이 어색한 침묵을 가르고 있을 때였다.
“저, 로제. 그래서 병사들은 돌아갔나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넘긴 라비엘리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다.
크게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나온 김에 궁금하다는 듯 무심하게.
“네, 혹시 수상한 자들이나 총상을 입은 자는 없는지 묻더라고요.”
그 말에 라비엘리는 공연히 발목이 욱신거렸다.
낙마했다는 말은 그대로 믿었겠지?
설마 병사들에게 수상한 자가 있다고 말한 건 아니겠지?
발목을 다친 건 낙마의 흔적이 확실했지만, 드레스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건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만약 로제가 그 사실을 걸고넘어진다면 꽤 곤란해질 것이다.
‘어쩌지?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어제 있었던 살인 사건과 제가 연관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만약 크랜을 두둑하게 챙겨준다면 당장 입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로제처럼 말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고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사방에 피어나는 초조함을 달래려 찻잔을 들고 얼굴을 감추었을 때였다.
쟁반을 움켜쥐고 돌아서려던 로제가 천천히 고개를 틀며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부인께서도 갈라테이아 쪽으로 가셨지요? 사냥을 하러 가시던 길에 말에서 떨어졌다고.”
어쩌면 계속 기다려온 질문이었다.
“네, 맞아요.”
뭐든 말해야 할 타이밍이란 걸 알고 있지만, 간신히 대답하는 것 말고는 달리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혹시 수상한 자들은 못 보셨나요?”
“네, 못 봤어요.”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행여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본 건 아닐까.
라비엘리는 말하는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사내들의 잔상을 지워내려 몹시 애를 써야 했다.
“다행이네요. 어제는 정말 위험할 뻔했어요.”
“네.”
“그런 불한당 같은 놈들을 마주치면 큰일이지요.”
“네, 그렇죠.”
“그래도 든든한 신사분이 있어 다행이지만 말이에요.”
로제는 루시안을 떠올렸는지 잠시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그럼 식사하시고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고마워요, 로제.”
로제가 나간 뒤 라비엘리는 그대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뒤에도 손이 계속 떨리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라비엘리는 왼손으로 차갑게 식은 오른손을 붙잡았다.
분명 로제와 대화하며 차를 몇 모금 넘긴 것도 같은데, 차 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제가 떨어뜨리고 간 말이 목구멍까지 꽉 막고 있는 탓이다.
‘설마 우리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들이 라비엘리를 움켜쥔 탓에 침대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릎을 세우고 부어오른 발목을 두어 번 매만졌을 때, 아침에 울렸던 것보다 다소 묵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루시안였다.
“잘 잤나요?”
그는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린 라비엘리와는 다르게 말쑥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의 반반한 면면에 불쑥 화가 치민 라비엘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뇨.”
“저런, 발목이 많이 아픈가요?”
루시안은 작위적으로 눈썹을 올렸다 내리더니 라비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