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세상에, 소변이라도 본 거예요?”
“그만해요!”
“쉿, 지금은 목소리가 너무 컸어요.”
“…….”
“착해라, 말을 참 잘 듣는군요. 그러니 지옥 같은 곳에서 얌전히 살았겠지.”
마지막 목소리엔 언뜻 살기마저 느껴진다.
라비엘리는 고개를 들어 루시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흉흉하고 번뜩이는 눈매다.
라비엘리가 가까스로 마른 목구멍 사이로 침을 흘렸을 때, 루시안의 목소리도 따라 넘어갔다.
“난 아니거든요.”
가능하다면 울고 싶었다.
루시안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는 사실과,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말았다는 것, 더는 후작가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들이 뒤섞였다.
이러다 몸이 쪼개지는 것은 아닌지, 계속하다간 몸 안의 것들이 전부 뒤섞이는 건 아닌지 싶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쉿.”
순간 라비엘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한 루시안이 느른한 미소를 보였다.
“이런…… 울어요?”
라비엘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예상치 못하게 밀려온 이물감이 그녀의 눈물을 밀어낸 탓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등으로 쓱 문지르곤 말갛고 흰 얼굴을 들었다.
“아니요.”
아래에서 올려다본 루시안의 얼굴은 평소에 보던 것과는 몹시 달랐다.
피어난 홍조, 벌어진 입술과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게 뜨인 두 눈…….
“그만할까요?”
그녀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진다. 제 것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는 여인을 바라보는 게 황홀한 동시에 죄스럽다.
그것은 오히려 루시안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순진하고 어린 여인의 속은, 그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자극적이었다.
라비엘리는 울음과 신음이 뒤섞인 소리를 냈다. 마치 끙끙 앓는 소리 같기도, 고양이의 울음 같기도 했다
아래가 전부 빠질 듯 끔찍한 통증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 미묘한 기운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신음을 내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지금보다 더 강렬한 자극을 원했다.
신이 제게 내릴 벌을 잊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놀라운 쾌락을.
사실 지금도 몸이 꿰뚫릴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좋았다.
“제발, 루시안.”
라비엘리가 메마른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제 몸이 덜컹하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장면이 뒤바뀌었다.
“헉, 헉…….”
다시 어둠 속.
촛불마저 힘을 잃어가는 새벽, 침대에서 홀로 눈을 뜬 라비엘리가 잔뜩 젖어 들러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맙소사.”
현실처럼 생생한 꿈이었다.
마치 홀린 사람처럼 시트를 들춰보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
라비엘리는 잔뜩 젖어버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호흡을 골랐다.
멍청하고 한심한 꿈이다.
라비엘리는 찬찬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러다 불쑥 루시안의 웃음과 뜨거웠던 손길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라비엘리.’
그녀는 두 손으로 양팔을 감싸 안았다.
힘든 하루를 보낸 탓이다.
게다가 큰일을 당할 뻔한 걸 그가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루시안과 며칠 지내며 처음보다 다소 편해졌기 때문이다.
라비엘리는 이런 꿈을 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만들어내려 애를 썼다.
그런데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꿈이라 넘겨버리기엔 너무도 생생하게 피어나는 루시안 마이어의 웃음과 목소리 때문이다.
‘아아…… 한심한 생각은 그만둬.’
라비엘리는 이 모든 것이 제 머리가 만들어낸 거짓이라는 사실보다, 다시 홀로 남았다는 것이 몹시 우울하게 느껴졌다.
* * *
루시안은 그날 밤 잠들 수 없었다.
늘 장난스럽게 빛나던 눈동자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적갈색 눈은 낮게 침전되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사람을 죽일 때의 눈빛처럼.
그는 무심한 얼굴로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아무렇게나 의자에 주저앉았다.
얼마간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루시안이 깃펜을 쥔 건, 어딘가에서 어렴풋이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루시안 마이어는 깃펜과 함께 꺼낸 종이를 펼치곤 막힘없이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니엘.’
마이어가에 오기 전, 루시안은 늦어도 사흘에 한 번은 니엘 페른에게 편지를 쓰겠노라 다짐하였다.
그것은 니엘과 한 약속을 되새기겠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짐과는 다르게 루시안은 꽤 오랜만에 니엘의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니엘, 나는 지금 갈라테이아 인근에 와 있어. 험한 지형으로 사냥꾼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지. 물론 악명 높은 고개를 아직 가지는 않았어. 알다시피 사냥이 내 취향은 아닌 데다 일이 좀 있었거든.’
일을 벌이려 나왔으나 결국 다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루시안은 낯선 사내들에게 붙들려 마구 흐트러진 채 울부짖던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의 울음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으며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기는 것처럼 온몸이 찢겨나갈 것만 같았다.
‘산세가 험해서 웬만한 사람에겐 어렵다고 소문난 곳이지. 하지만 말을 길들이기엔 그만이고 짐승들 살집이 좋아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소굴이랄까.’
거기까지 적었을 때 루시안은 니엘이 갈라테이아를 모를 리 없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자신은 필요 이상으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누워서 다른 이들이 들려주는 말이나 책 속 활자가 아니라면, 바깥일을 알 수 없는 니엘 페른이 궁금한 건 겨우 이런 내용이 아니다.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어.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야. 뭐든 성급하면 일을 그르치니까.’
니엘 페른은 원인 모를 병증으로 온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가벼운 발목 통증이라고 생각한 것이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왔고,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니엘은 힐스에서 제법 유명한 의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식사부터 목욕까지 전부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다.
아마 니엘의 아버지가 거상이 아니었다면, 그는 다리가 굳어진 순간 뒷골목에 내다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니엘을 집어삼킨 병은 조금씩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온종일 천장만 올려다봐야 하는 사내의 정신이 건강할 리는 없었으니까.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하면서 네 소식을 받을 수단을 만들지 못한 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야.’
거기까지 적은 루시안 마이어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다시 창문 밖을 내다보자 짙은 어둠이 금방이라도 저를 덮칠 듯 무겁게 깔려 있었다.
다시 무슨 말이든 적어야 했지만 루시안은 어떤 말도 적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방 안을 서성이던 루시안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젠장…….’
목구멍에 걸린 말들이, 그가 써야 하지만 쓸 수 없는 단어가 루시안을 숨 막히게 한다.
그는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평정심을 찾기 어려웠다.
라비엘리 르휜.
시작은 그녀였고, 결말도 그녀여야만 한다.
루시안 마이어는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어떤 감정도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책상에 앉은 루시안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편지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깃펜은 거침없이 움직였으나 미간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하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한참 동안 글을 적어가던 루시안이 마침내 펜을 내려놓았다.
검은색으로 빼곡히 채운 종이를 반으로 접자 그의 세상이나 다름없는 니엘 페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여운 녀석. 지금쯤 어찌 지내고 있을는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을 한 사내는 그리 머지않은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